박용원(朴用元)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C6A9C6D0B1874X0 |
이명(異名) | 박영훈(朴泳薰) |
생년 | 1848(헌종 14)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반남(潘南)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상세내용]
박용원(朴用元)
1848년(헌종 14)∼미상. 조선 말기 문신. 초명은 박영훈(朴泳薰)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거주지 문제로 삭과(削科)되어 제주로 정배되었다가, 복과(復科)되어 1880년(고종 17)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1889년(고종 26)부터 통위영군사마(統衛營軍司馬)‧장악원정(掌樂院正)‧형조참의‧통리교섭통상사무참의(統理交涉通商事務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1893년(고종 30) 안핵사(按覈使)로 임명되어 개성 민란의 혼란을 잠재운 후 좌부승지‧외무참의‧한성부소윤‧순창군수를 지냈다. 1901년(광무 5) 안핵사가 되어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란을 수습하였으며, 1906년(광무 10)부터 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비서감승(秘書監丞) 겸 장례원장례(兼掌禮院掌禮) 등을 역임하였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거주지 문제로 삭과(削科)되어 제주로 정배되었다가, 복과(復科)되어 1880년(고종 17)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1889년(고종 26)부터 통위영군사마(統衛營軍司馬)‧장악원정(掌樂院正)‧형조참의‧통리교섭통상사무참의(統理交涉通商事務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1893년(고종 30) 안핵사(按覈使)로 임명되어 개성 민란의 혼란을 잠재운 후 좌부승지‧외무참의‧한성부소윤‧순창군수를 지냈다. 1901년(광무 5) 안핵사가 되어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란을 수습하였으며, 1906년(광무 10)부터 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비서감승(秘書監丞) 겸 장례원장례(兼掌禮院掌禮)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大韓帝國官員履歷書
純宗實錄
大韓帝國官員履歷書
[집필자]
김혜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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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