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악(李壽岳)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218C545B1703X0 |
자(字) | 치숭(致崇) |
호(號) | 우헌(于軒) |
생년 | 1845(헌종 11) |
졸년 | 1927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재령(載寧) |
활동분야 | 호국 > 의병 |


[상세내용]
이수악(李壽岳)
1845년(헌종 11)∼1927년. 조선 말기 의병장‧학자. 자는 치숭(致崇)이고, 호는 우헌(于軒)이다. 본관은 재령(載寧)이고, 본적은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이다.
이휘일(李徽逸)의 후손으로, 부친 이담영(李聃榮)과 모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정백(李庭栢)의 딸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경전(經典)에 밝았으며 문명을 떨쳤으나, 1886년(고종 23) 대원군의 유폐와 관련된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북도 명천(明川)으로 귀양을 갔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열읍(列邑)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였으며, 1896년(건양 1)에는 영덕과 영해(寧海) 지역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93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유고로 8권의 시문집인 『우헌집(于軒集)』이 전하는데, 대부분 명승지를 유람하거나 국권을 잃어버린 슬픔을 읊은 것들이다.
이휘일(李徽逸)의 후손으로, 부친 이담영(李聃榮)과 모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정백(李庭栢)의 딸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경전(經典)에 밝았으며 문명을 떨쳤으나, 1886년(고종 23) 대원군의 유폐와 관련된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북도 명천(明川)으로 귀양을 갔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열읍(列邑)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였으며, 1896년(건양 1)에는 영덕과 영해(寧海) 지역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93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유고로 8권의 시문집인 『우헌집(于軒集)』이 전하는데, 대부분 명승지를 유람하거나 국권을 잃어버린 슬픔을 읊은 것들이다.
[참고문헌]
[집필자]
유치석
수정일 | 수정내역 |
---|---|
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