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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휘인(宋彙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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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태원(泰元)
생년1810(순조 10)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문신
송일항(宋一沆)

[상세내용]

송휘인(宋彙仁)
1810년(순조 10)~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태원(泰元)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증조부는 송재통(宋載通)이고, 조부는 송시현(宋時鉉)이며, 부친은 송일항(宋一沆)이다. 모친은 심희지(沈禧之)의 딸이다.

1865년(고종 2) 식년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정랑(禮曹正郞)‧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 사간직을 주로 지냈다.

1869년(고종 6) 병인박해 후 페롱(Férron) 신부의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가지고 청나라에 가는 최인서(崔仁瑞)‧지자익(池子益) 등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천주교 신자 조철증(趙喆增)이 자결하자 그를 산 채로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았던 조유선(趙猷善)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송휘인(宋彙仁)과 사간들은 조유선을 풀어주지 말고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1875년(고종 12)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서 변장(邊將)을 천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책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877년(고종 14) 우레가 치는 일이 발생하자 임금에게 수양에 더욱 힘쓸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다음 해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임명되었으나 1879년(고종 16) 병을 이유로 물러났다. 같은 해에 도당록(都堂錄)에 이름을 올렸고,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었다. 이후 좌통례(左通禮)‧병조참의(兵曹參議)‧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