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석(李明錫)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BA85C11DB1798X0 |
자(字) | 여삼(汝三) |
생년 | 1798(정조 22)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무신 |

부 | 이언경(李彦敬) |

[상세내용]
이명석(李明錫)
1798년(정조 22)~미상. 조선 후기 무신. 자는 여삼(汝三)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재양부정(載陽副正) 이급(李級)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부사(府使) 이유원(李裕遠)이고, 조부는 병아(兵亞) 이문혁(李文爀)이며, 부친은 부사 이언경(李彦敬)이다. 외조부는 양덕여(梁德輿)이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유문식(柳文植)의 딸과 유현재(兪鉉載)의 딸이다.
1836년(헌종 2) 춘당대 중시에서 1등으로 무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아장(亞將)‧가산군수(嘉山郡守)‧황해도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경상좌도병마절도사‧회령부사(會寧府使)‧창원부사(昌原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842년(헌종 8) 가산군수 재임 시절의 실정(失政)이 평안도청북암행어사(平安道淸北暗行御史) 임긍수(林肯洙)에 의해 조정에 알려져 벌을 받았다. 1859년(철종 10) 회령부사 재임 시절에는 뇌물을 받고, 재물을 탐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파면되었다. 1864년(고종 1) 종친부(宗親府)의 추천으로 교정당상(校正堂上)에 제수되었다. 1866년(고종 3) 창원부사 재임 시절 근무성적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임금의 어새(御璽)가 찍힌 유서(諭書)와 표리(表裏)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1867년(고종 4) 창원부사 재임 당시의 실정이 경상도암행어사 박선수(朴瑄壽)에 의해 조정에 보고되어 파직되었다.
재양부정(載陽副正) 이급(李級)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부사(府使) 이유원(李裕遠)이고, 조부는 병아(兵亞) 이문혁(李文爀)이며, 부친은 부사 이언경(李彦敬)이다. 외조부는 양덕여(梁德輿)이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유문식(柳文植)의 딸과 유현재(兪鉉載)의 딸이다.
1836년(헌종 2) 춘당대 중시에서 1등으로 무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아장(亞將)‧가산군수(嘉山郡守)‧황해도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경상좌도병마절도사‧회령부사(會寧府使)‧창원부사(昌原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842년(헌종 8) 가산군수 재임 시절의 실정(失政)이 평안도청북암행어사(平安道淸北暗行御史) 임긍수(林肯洙)에 의해 조정에 알려져 벌을 받았다. 1859년(철종 10) 회령부사 재임 시절에는 뇌물을 받고, 재물을 탐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파면되었다. 1864년(고종 1) 종친부(宗親府)의 추천으로 교정당상(校正堂上)에 제수되었다. 1866년(고종 3) 창원부사 재임 시절 근무성적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임금의 어새(御璽)가 찍힌 유서(諭書)와 표리(表裏)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1867년(고종 4) 창원부사 재임 당시의 실정이 경상도암행어사 박선수(朴瑄壽)에 의해 조정에 보고되어 파직되었다.
[참고문헌]
武譜
憲宗實錄
高宗實錄
憲宗實錄
高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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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