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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후(尹致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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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777(정조 1)
졸년1812(순조 12)
시대조선후기
본관해주(海州)
활동분야문신
윤응열(尹凝烈)

[상세내용]

윤치후(尹致後)
1777년(정조 1)~1812년(순조 12).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증조부는 윤득선(尹得宣)이고, 조부는 윤상동(尹尙東)이다. 부친 윤응열(尹凝烈)과 모친 이관정(李寬鼎)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07년(순조 7)에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시행한 이후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춘당대(春塘臺)에서 알성과(謁聖科)를 치렀는데, 이 시험에 참여하여 문과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809년(순조 9)에는 김학순(金學淳)‧박주수(朴周壽)‧윤치겸(尹致謙)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이후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1812년(순조 12)에 홍경래(洪景來)의 난에 연루되어 국문(鞠問)을 받았는데, 심문 결과 홍경래의 난이 발생했을 때 처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피신의 계책을 세웠고, 박종일(朴鍾一)에게 여러 가지 흉언을 전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홍경래의 무리들이 도성으로 쳐들어와서 양반들을 도륙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이 사실을 미리 아뢰지 않았다는 정황이 밝혀졌다. 그 결과 사형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