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수(徐配修)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BC30C218B1743X0 |
자(字) | 양여(養汝) |
생년 | 1743(영조 19) |
졸년 | 1796(정조 20)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대구(大丘) |
활동분야 | 문신 |

부 | 서명호(徐命浩) |

[관련정보]
[상세내용]
서배수(徐配修)
1743년(영조 19)~1796년(정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이며, 자는 양여(養汝)이다.
증조부는 서문재(徐文在)이고, 조부는 서종석(徐宗奭)이며, 부친은 서명호(徐命浩)이다.
1777년(정조 1) 증광시에서 생원 2등 10위로 합격하였고, 같은 해 증광시 문과에서 갑과 2위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81년(정조 5) 찬집청낭청(纂輯廳郎廳)을 시작으로, 1783년(정조 7)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정언(正言) 등으로 삼사의 언관직에서 활동하였다. 1785년(정조 9)에는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었으며, 이듬해인 1786년(정조 10) 홍문록(弘文錄)에 등안(登安)되었다. 1787년(정조 11)에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서 상소를 올려, 징계하여 다스림을 엄하게 할 것, 성학(聖學)에 부지런하여 유교의 근본을 바로 세울 것, 기강을 떨쳐서 풍속을 힘쓰게 할 것 등 7가지를 제시하여 언관으로서 직분을 다하였다. 1790년(정조 14)에는 홍문관 응교(應敎)로서 전(前) 우의정 김종수(金鍾秀)를 삭출(削黜)하라는 상소를 연명으로 올리기도 하였으며, 그 해 문관 비변사낭청(備邊司郞廳)에 임명되었다. 동년 8월에는 맹산현감(孟山縣監)으로 외방수령으로 근무하였으며, 1794년(정조 18) 외직을 마치고 돌아와 승지에 임명되었다. 1795년(정조 19)에는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나 한 달도 못되어 정조에 대한 무함을 해명하려 할 때 우물쭈물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좌천되었으며, 1796년(정조 20) 대간으로부터 이익을 도모하는 일을 계속 벌인다 하여 탄핵받았다.
증조부는 서문재(徐文在)이고, 조부는 서종석(徐宗奭)이며, 부친은 서명호(徐命浩)이다.
1777년(정조 1) 증광시에서 생원 2등 10위로 합격하였고, 같은 해 증광시 문과에서 갑과 2위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81년(정조 5) 찬집청낭청(纂輯廳郎廳)을 시작으로, 1783년(정조 7)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정언(正言) 등으로 삼사의 언관직에서 활동하였다. 1785년(정조 9)에는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었으며, 이듬해인 1786년(정조 10) 홍문록(弘文錄)에 등안(登安)되었다. 1787년(정조 11)에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서 상소를 올려, 징계하여 다스림을 엄하게 할 것, 성학(聖學)에 부지런하여 유교의 근본을 바로 세울 것, 기강을 떨쳐서 풍속을 힘쓰게 할 것 등 7가지를 제시하여 언관으로서 직분을 다하였다. 1790년(정조 14)에는 홍문관 응교(應敎)로서 전(前) 우의정 김종수(金鍾秀)를 삭출(削黜)하라는 상소를 연명으로 올리기도 하였으며, 그 해 문관 비변사낭청(備邊司郞廳)에 임명되었다. 동년 8월에는 맹산현감(孟山縣監)으로 외방수령으로 근무하였으며, 1794년(정조 18) 외직을 마치고 돌아와 승지에 임명되었다. 1795년(정조 19)에는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나 한 달도 못되어 정조에 대한 무함을 해명하려 할 때 우물쭈물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좌천되었으며, 1796년(정조 20) 대간으로부터 이익을 도모하는 일을 계속 벌인다 하여 탄핵받았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집필자]
나영훈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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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