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성(徐有成)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C720C131B1739X0 |
자(字) | 군집(君集) |
생년 | 1739(영조 15)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대구(大丘) |
활동분야 | 문신 |

부 | 서영수(徐永修) |

[상세내용]
서유성(徐有成)
1739년(영조 15)~미상.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이다. 자는 군집(君集)이다.
증조부는 서종대(徐宗大)이고, 조부는 서명훈(徐命勳)이며, 부친은 서영수(徐永修)이다.
1775년(영조 51) 정시 병과 12위로 급제하였고, 1779년(정조 3) 도당록(都堂錄)에서 5점을 받았다. 이후 주로 홍문관(弘文館)‧사간원(司諫院) 등의 관직을 맡았다.
1779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정조에게 학문에 힘쓸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홍낙순(洪樂純)‧이유경(李儒慶)‧홍국영‧송덕상(宋德相) 등을 파직시키고,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782년(정조 6) 사간(司諫)으로 재직 중, 좌의정(左議政) 홍낙순에게 중도부처(中途付處)의 벌을 내려 달라는 삼사(三司)의 합계에 이름을 올렸다. 정조는 홍낙순을 이미 파직한 상태에서 중도부처의 형을 내리른 것은 옳지 않다며, 상소를 올린 삼사의 신하를 파직하라는 명을 내렸다. 1783년(정조 7) 시험장의 관리를 맡았는데, 장내에서 소동이 일어나 6명이 죽은 일로 인하여 용궁현(龍宮縣)으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한 달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등에 임명되었다.
증조부는 서종대(徐宗大)이고, 조부는 서명훈(徐命勳)이며, 부친은 서영수(徐永修)이다.
1775년(영조 51) 정시 병과 12위로 급제하였고, 1779년(정조 3) 도당록(都堂錄)에서 5점을 받았다. 이후 주로 홍문관(弘文館)‧사간원(司諫院) 등의 관직을 맡았다.
1779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정조에게 학문에 힘쓸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홍낙순(洪樂純)‧이유경(李儒慶)‧홍국영‧송덕상(宋德相) 등을 파직시키고,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782년(정조 6) 사간(司諫)으로 재직 중, 좌의정(左議政) 홍낙순에게 중도부처(中途付處)의 벌을 내려 달라는 삼사(三司)의 합계에 이름을 올렸다. 정조는 홍낙순을 이미 파직한 상태에서 중도부처의 형을 내리른 것은 옳지 않다며, 상소를 올린 삼사의 신하를 파직하라는 명을 내렸다. 1783년(정조 7) 시험장의 관리를 맡았는데, 장내에서 소동이 일어나 6명이 죽은 일로 인하여 용궁현(龍宮縣)으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한 달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등에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正祖尸祿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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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