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경(兪漢敬)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C720D55CACBDB1734X0 |
| 개명(改名) | 유한모(兪漢謨) |
| 자(字) | 여직(汝直) |
| 생년 | 1734(영조 10) |
| 졸년 | 1816(순조 16) |
| 시대 | 조선후기 |
| 본관 | 기계(杞溪) |
| 활동분야 | 문신 |

| 부 | 유언호(兪彦好) |

[관련정보]
[상세내용]
유한경(兪漢敬)
1734년(영조 10)~1816년(순조 16).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여직(汝直)이고, 개명은 유한모(兪漢謨)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증조부는 유명응(兪命凝)이고, 조부는 유위기(兪偉基)이다. 부친 통훈대부(通訓大夫) 지제교(知製敎) 유언호(兪彦好)와 모친 조명교(曹命敎)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은 유한근(兪漢謹)이고, 동생은 유한눌(兪漢訥)‧유한돈(兪漢敦)이다.
1756년(영조 32) 식년시에서 진사 3등 68위로 합격하였다.
1770년(영조 46)에는 설서(說書)에 임명되었다. 1771년(영조 47) 정시 문과에서 병과 6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1776년(영조 52)에는 경기어사(京畿御史)에 임명되어, 각 지방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이후, 임금을 모함한 무리와 연루되어, 유배형이 내려졌다. 그러나 직접적 관련성이 없었으므로, 곧 사면되었다. 1785년(정조 9)에는 지제교에 선발되었다.
관직은 대사간(大司諫)‧청송부사(靑松府使)‧부호군(副護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종2품에 이르렀다.
1788년(정조 12)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동지정사(冬至正使) 이재협(李在恊)과 부사(副使) 어석정(魚錫定) 등과 함께 청나라에 사행을 다녀왔다. 1793년(정조 17) 대사간 재임 시절, 통제사 이윤경(李潤慶) 자신의 체직 행사를 스스로 폐지하였다가 처벌을 당할 때 이윤경을 두둔한 일로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1798년(정조 22) 청송부사 재임 시절 청송 고을에 풍년이 들어 추수된 좁쌀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그 중 3천 석(石)을 정해진 값으로 곡식이 부족한 다른 읍으로 보낼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1808년(순조 8) 개성유수 재임 시절 고을에 살고 있는 간사한 인물들과 교제를 하면서 청탁과 뇌물을 요구하는 등 부정(不正)을 일삼은 사실이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홍의영(洪儀泳)의 서계(書啓)로 인해 조정에 알려져 파직되었다가 대사간에 재임용되었다.
1816년(순조 16) 생원‧진사시에 합격한지 만 60년이 되어 임금이 접견을 청하였다.
증조부는 유명응(兪命凝)이고, 조부는 유위기(兪偉基)이다. 부친 통훈대부(通訓大夫) 지제교(知製敎) 유언호(兪彦好)와 모친 조명교(曹命敎)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은 유한근(兪漢謹)이고, 동생은 유한눌(兪漢訥)‧유한돈(兪漢敦)이다.
1756년(영조 32) 식년시에서 진사 3등 68위로 합격하였다.
1770년(영조 46)에는 설서(說書)에 임명되었다. 1771년(영조 47) 정시 문과에서 병과 6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1776년(영조 52)에는 경기어사(京畿御史)에 임명되어, 각 지방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이후, 임금을 모함한 무리와 연루되어, 유배형이 내려졌다. 그러나 직접적 관련성이 없었으므로, 곧 사면되었다. 1785년(정조 9)에는 지제교에 선발되었다.
관직은 대사간(大司諫)‧청송부사(靑松府使)‧부호군(副護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종2품에 이르렀다.
1788년(정조 12)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동지정사(冬至正使) 이재협(李在恊)과 부사(副使) 어석정(魚錫定) 등과 함께 청나라에 사행을 다녀왔다. 1793년(정조 17) 대사간 재임 시절, 통제사 이윤경(李潤慶) 자신의 체직 행사를 스스로 폐지하였다가 처벌을 당할 때 이윤경을 두둔한 일로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1798년(정조 22) 청송부사 재임 시절 청송 고을에 풍년이 들어 추수된 좁쌀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그 중 3천 석(石)을 정해진 값으로 곡식이 부족한 다른 읍으로 보낼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1808년(순조 8) 개성유수 재임 시절 고을에 살고 있는 간사한 인물들과 교제를 하면서 청탁과 뇌물을 요구하는 등 부정(不正)을 일삼은 사실이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홍의영(洪儀泳)의 서계(書啓)로 인해 조정에 알려져 파직되었다가 대사간에 재임용되었다.
1816년(순조 16) 생원‧진사시에 합격한지 만 60년이 되어 임금이 접견을 청하였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司馬榜目
英祖實錄
正祖實錄
司馬榜目
英祖實錄
正祖實錄
[집필자]
정병섭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