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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행(朴天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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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건(汝健)
생년1730(영조 6)
졸년1791(정조 15)
시대조선후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문신
박춘보(朴春普)

[상세내용]

박천행(朴天行)
1730년(영조 6)~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여건(汝健)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증조부는 박성하(朴成夏)이고, 조부는 박학령(朴鶴齡)이며, 부친은 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낸 박춘보(朴春普)이다.

1774년(영조 50) 정시 병과에 5위로 문과 급제하였고,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지평을 역임하던 1779년(정조 3)에 상소로 홍국영(洪國榮)의 사직에 신료들의 의견이 전무함을 지적하여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같은 해에 균역청(均役廳)이 공인(貢人)에게서 높은 가격으로 쌀을 구매하여 시중의 쌀 가격이 올라가는 상평법(常平法)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임금으로부터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하교를 받았다. 이후 지평‧수찬 등을 역임하고 1783년(정조 7)에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786년(정조 10)에 대사헌(大司憲) 윤승렬(尹承烈)과 응교(應敎) 조윤대(曺允大)와 함께 홍국영 사건 관계자에 대한 후속 처벌을 요청하는 삼사합계(三司合啓)를 거듭 올렸지만, 이를 빌미로 파직되었다. 그 후, 1789년(정조 13) 사간원대사간으로 복직됐다. 슬하에 아들 박대호(朴大浩)‧박지호(朴至浩)‧박치호(朴致浩)‧박수호(朴洙浩)‧박이호(朴履浩)‧박기호(朴氣浩)‧박태호(朴泰浩)를 두었다.

손자 박내만(朴來萬)이 1879년(고종 16)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면서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홍문관제학(兼弘文館提學)으로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日省錄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