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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약채(李若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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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흠(聖欽)
호(號)행휴재(行休齋)
호(號)속계거사(涑溪居士)
생년1727(영조 3)
졸년1782(정조 6)
시대조선후기
본관인천(仁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인항(李仁恒)
조부이영태(李英泰)
증조부이협(李莢)
고조부이승휘(李承輝)
처부박필정(朴弼廷)
외조부이재휘(李載輝)
출신지경상북도 대구(大邱)
묘소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쌍책면(雙冊面) 진정리(眞定里) 서하현(西霞峴)

[상세내용]

이약채(李若采)
1727년(영조 3)∼1782년(정조 6).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성흠(聖欽)이고, 호는 행휴재(行休齋) 또는 속계거사(涑溪居士)이다.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대구(大邱)이다.

고조부는 장사랑(將士郞) 이승휘(李承輝), 증조부는 이협(李莢), 조부는 이영태(李英泰), 부친은 이인항(李仁恒)이다. 외조부는 영천이씨(永川李氏) 통덕랑(通德郞) 이재휘(李載輝)이며, 처부는 반남박씨(潘南朴氏) 박필정(朴弼廷)이다.

이약채는 5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 피가 흐를 정도로 머리를 땅바닥에 찧어대어 모친을 놀라게 하였다. 이후 그는 마치 어른처럼 상례의 모든 절차를 모친과 함께 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하늘이 낸 효자라는 칭찬을 받았다.

1734년(영조 10) 그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종숙부 만오당(晩悟堂)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이 되었다. 비록 그는 과거를 위한 공부를 싫어하였지만 어머니의 명으로 시험을 보았다. 1753년(영조 29)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49위로 합격하고 1761년(영조 37) 칠석제(七夕製: 성균관 춘당대에서 칠석날 치루는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1761년(영조 37) 신사(辛巳) 정시(庭試) 병과(丙科) 15위로 급제하였다.

1765년(영조 41)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 1766년(영조 42)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제수(除授)되었고, 1767년(영조 43)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제수(除授)되었다. 그러나 전조(銓曹: 인사권을 쥐고 있던 이조와 병조)에서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다시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의망되었으나 노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771년(영조 47)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이후 다시 1781년(정조 6)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재임용되었으나 이미 병이 깊어져서 관직을 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묘소는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쌍책면(雙冊面) 진정리(眞定里) 서하현(西霞峴)에 있다.

[참고문헌]

行休齋文集
영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