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익성(沈益聖)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2ECC775C131B1696X0 |
이명(異名) | 김계일(金啓一) |
자(字) | 여문(汝文) |
생년 | 1696(숙종 22)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청송(靑松) |
활동분야 | 문신 |

부 | 심훤(沈楦) |

[상세내용]
심익성(沈益聖)
1696년(숙종 22)~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여문(汝文)이다. 초명은 김계일(金啓一)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증조부는 심적(沈迪)이고, 조부는 심지안(沈志顔)이며, 부친은 심훤(沈楦)이다. 외조부는 이명(李蓂)이다.
1733년(영조 9) 식년시에 병과 21위로 문과 급제했다.
1743년(영조 19)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고, 1741년(영조 20) 사헌부헌납(獻納)이 되었다. 1744년(영조 20)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나 어영대장(御營大將) 박문수(朴文秀)를 쫓아내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이 갈렸다. 1751년(영조27) 6월 사헌부헌납이 되었고, 11월 사헌부집의(執義)가 되었으며, 1752년(영조 28)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다.
1753년(영조 29) 평양서윤(平壤庶尹) 박사백(朴師伯)과 목천현감(木川縣監) 김창운(金昌運)을 탄핵하였다가 파직되었다. 1756년(영조 32)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1758년(영조 34) 시강원입직관(侍講院入直官)으로 입직하면서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며 사슴 가죽을 하사받았다. 1765년(영조 41) 사헌부집의로 ‘기쁨과 노여움을 절제하고 절기에 따라 잘 조섭하기를 바란다’고 밝힌 뜻이 매우 모호하다면서 파직되었다. 1775년(영조 51) 80이 넘었으나 자급이 높지 않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안 영조가 자급을 높여 주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붙여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증조부는 심적(沈迪)이고, 조부는 심지안(沈志顔)이며, 부친은 심훤(沈楦)이다. 외조부는 이명(李蓂)이다.
1733년(영조 9) 식년시에 병과 21위로 문과 급제했다.
1743년(영조 19)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고, 1741년(영조 20) 사헌부헌납(獻納)이 되었다. 1744년(영조 20)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나 어영대장(御營大將) 박문수(朴文秀)를 쫓아내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이 갈렸다. 1751년(영조27) 6월 사헌부헌납이 되었고, 11월 사헌부집의(執義)가 되었으며, 1752년(영조 28)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다.
1753년(영조 29) 평양서윤(平壤庶尹) 박사백(朴師伯)과 목천현감(木川縣監) 김창운(金昌運)을 탄핵하였다가 파직되었다. 1756년(영조 32)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1758년(영조 34) 시강원입직관(侍講院入直官)으로 입직하면서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며 사슴 가죽을 하사받았다. 1765년(영조 41) 사헌부집의로 ‘기쁨과 노여움을 절제하고 절기에 따라 잘 조섭하기를 바란다’고 밝힌 뜻이 매우 모호하다면서 파직되었다. 1775년(영조 51) 80이 넘었으나 자급이 높지 않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안 영조가 자급을 높여 주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붙여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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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