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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철(李廷喆)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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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명(原明)
시호(諡號)효정(孝靖)
생년1695(숙종 21)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이상백(李相伯)

[상세내용]

이정철(李廷喆)
1695년(숙종 21)~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원명(原明)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증조부는 이민후(李敏厚)이고, 조부는 이제두(李齊杜)이며,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이상백(李相伯)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시에서 진사 70위로 합격하였고, 1756년(영조 32)에는 62세의 나이로 기로정시(耆老庭試) 문과에서 을과 1위로 급제하였다. 이로 인해 특별히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고, 이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우윤(右尹) 등을 역임하였다.

1762년(영조 38)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재직 시에는 젊어서 문명(文名)이 있었는데도 나이가 늙어 지방관에 나아가 크고 작은 정무를 모두 하리(下吏)에게 맡겼으므로 장령 한필수(韓必壽)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773년(영조 49) 윤3월에는 사마시에 등재한 것이 회갑을 맞이하였으므로 특별히 왕에게서 유건(儒巾)과 청삼(靑杉)을 받았으며, 특별히 중추부(中樞府) 지사에 제수되었다. 이 해 6월에는 한성부 우윤으로 재직 시 송사하는 사람에게 뇌물을 강요하여 후하게 받았으므로 대사간 이한일(李漢一)의 탄핵을 받아 삭판(削版)되었다. 1822년(순조 22) 3월 효정(孝靖)이란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純祖實錄

[집필자]

나영훈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