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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귀명(趙龜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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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보여(寶汝)
호(號)건천자(乾川子)
호(號)동계(東谿)
생년1693(숙종 19)
졸년1737(영조 13)
시대조선중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태수(趙泰壽)
조부조상우(趙相愚)
외조부심권(沈權)
묘소광주(廣州) 청계산(淸溪山)
저서『동계집(東谿集)』

[상세내용]

조귀명(趙龜命)
1693년(숙종 19)∼1737년(영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석여(錫汝)보여(寶汝), 호는 건천자(乾川子)동계(東谿).

조부는 우의정(右議政) 조상우(趙相愚)이고, 부친은 첨정(僉正) 조태수(趙泰壽)이다. 모친은 청송심씨(靑松沈氏) 심권(沈權)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 13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여 수천 언(言)의 대책(對策)을 지었다. 1711년(숙종 37) 신묘식년사마시(辛卯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 3등으로 합격하였다. 1727년(영조 3) 정미증광문과(丁未增廣文科) 회시(會試)에 참여하였으나 주고관(主考官) 정형익(鄭亨益)이 문체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빼버리니 이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의 가문은 소론(少論)의 명문이었지만 다른 종형제인 조현명(趙顯命), 조문명(趙文命) 등과 달리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또 자주 병고에 시달리면서 성리학(性理學)에서 벗어나 노장(老莊)과 불교(佛敎)에 심취하고 문장가(文章家)로 자처하여 소식(蘇軾)의 의기(意氣)를 사모하였기 때문에 당시 문단(文壇)에서 이단시된 경향마저 있었다.

1735년(영조 11)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송인명(宋寅明)조구명을 문학(文學)이 있는 선비로 천거하여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에 오르고,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태인현감(泰仁縣監)개령현감(開寧縣監)으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36년(영조 12)에 익위(翊衛)가 되었으며, 『예기(禮記)』의 「문왕세자(文王世子)」 등의 글을 병풍으로 써서 세자궁에 올렸다. 1737년(영조 13) 9월 영조가 그에게 외읍(外邑)에 시험해 보도록 명했으나 27일에 사망했다. 광주(廣州) 청계산(淸溪山)에서 장사지냈다.

그의 문집인 『동계집(東谿集)』은 그의 종조형(從祖兄)인 조현명(趙顯命)이 편찬하고 간행하였다. 문집의 분량은 모두 12권 6책인데, 문집을 간행할 때 일족(一族) 중 문재(文才)를 지니고서 요절한 조계명(趙啓命)『남곡유고(南谷遺稿)』조구진(趙九鎭)『청량헌고(聽凉軒稿)』를 부집(附集)하여 함께 간행하였다. 특히 그 문집에 「독노자(讀老子)」에서 노자와 장자의 차이를 강조하였다. 장자는 논심(論心)에 묘(妙)하고, 노자는 관물(觀物)에 깊은데 노자의 학이 더 우수하다고 평하였다.

1773년에는 영조가 문집의 서문을 써서 내렸는데, 이는 그가 비록 벼슬로는 현달하지 못하였으나 세제(世弟) 입학 시에 장명생(將命生)을 맡았으며, 또 탕평책을 주장한 점과 이천보(李天輔) 등과 친하였다는 말을 듣고 서문을 써서 내린 것이다. 그 후 일부 간본(刊本)에서는 영조의 어제 서문을 추각(追刻)하여 합철(合綴)하였다. 현재 규장각과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文集叢刊解題
東谿集

[집필자]

김영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