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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제(朴昌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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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순(子順)
생년1687(숙종 13)
졸년1728(영조 4)
시대조선중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무신
박동상(朴東相)

[상세내용]

박창제(朴昌悌)
1687년(숙종 13)~1728년(영조 4).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자순(子順)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경(京; 서울)이다.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행통진현감(行通津縣監) 박동상(朴東相)이다. 형으로 박창효(朴昌孝)가 있다.

1711년(숙종 37) 식년시 병과에 59위로 무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정주목사(定州牧使)‧순영종군(巡營宗軍)‧함경중군(咸鏡中軍) 등을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순영종군 재임 시절 함경감사(咸鏡鑑司) 권익관(權益寬)이 순시를 마치고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는 조정의 명령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제 멋대로 순영(巡營)을 비워둔 채 진영(鎭營)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관영(官營) 소속의 친기위(親騎衛)를 집합시켜서 점열(點閱)을 한 후 모자라는 말[馬]을 채워 넣고, 영문(營門) 창고에 있는 무명 수백 필을 꺼내서 전대(纏帶)를 만들고, 200필의 베와 몇 섬의 미숫가루를 챙겨놓고, 시장에 가서 전쟁할 때 쓰는 전립(戰笠)과 미투리를 전부 빼앗아 들였다. 이 때 함경북도안무사(咸鏡北道按撫使) 윤헌주(尹憲柱)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집합 시켰던 친기위를 해체 시키고, 전대를 만들었던 무명과 미숫가루를 창고에 집어넣고 전립과 미투리를 모두 시장 상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이러한 일이 조정에 알려져 국문(鞠問)을 받던 중 매 맞아 죽었다.

[참고문헌]

辛卯武科榜目
英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