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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응수(黃應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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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숙(汝淑)
생년1683(숙종 9)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창원(昌原)
활동분야무신
황기(黃錡)

[상세내용]

황응수(黃應洙)
1683년(숙종 9)~미상.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여숙(汝淑)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출신지는 강원도 평강(平康)이다.증조부는 황영(黃泳)이고, 조부는 황도형(黃道亨)이며, 부친은 행영흥대도호부사함흥진관병마첨절제사(行永興大都護府使咸興鎭管兵馬僉節制使) 황기(黃錡)이다. 형은 황응청(黃應淸)이고, 동생은 황응렴(黃應濂)이다. 서형은 황응천(黃應天)‧황응정(黃應井)이다.

1710년(숙종 36) 증광시에 병과 49위로 무과 급제했다. 1732년(영조 8) 12월 7일 해미현감(海美縣監)으로 있으면서 유리걸식하는 백성이 늘어나는데도 재산을 수탈하여 자기 재산을 늘리는 데만 급급하였으므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민정(閔珽)의 탄핵에 영조는 풍문은 다 믿을 수 없다며 들어주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28일 거듭하여 사헌부(司憲府)가 탄핵하였으나 영조는 황응수(黃應洙)의 이름을 전계(傳啓)에서 삭제하라고 하였다. 1734년(영조 10) 3월 3일 교만하고 망령스러우며, 그의 폐단이 널리 알려졌으므로 정주목사(定州牧使) 자리를 체직해야 한다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안상휘(安相徽)가 탄핵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3월 13일 거듭된 탄핵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또 다시 황응수의 이름을 전계에서 삭제하라고 하였다. 4월 9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계유(洪啓裕)가 물의를 일으켜 놓고 뻔뻔스럽게 부임한 황응수와 황응수의 부임을 재촉한 평안감사(平安監司) 박사수(朴師洙)를 종중추고(從重推考)해야 한다고 탄핵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1739년(영조 15) 물의를 일으켜 수행아전을 감옥에 가두었음에도 태연히 이산부사(理山府使)로 부임하였으므로 파직해야 한다는 총융사(摠戎使) 구성임(具聖任)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