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민후(黃敏厚)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669BBFCD6C4B1681X0 |
자(字) | 달부(達夫) |
생년 | 1681(숙종 7) |
졸년 | 1738(영조 1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황주(黃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황민후(黃敏厚)
1681년(숙종 7)∼1738년(영조 14) 9월 3일.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달부(達夫)이다. 본관은 황주(黃州)이고, 출신지는 평안남도 평양(平壤)이다.
증조부는 황윤원(黃胤遠)이고, 조부는 황대창(黃戴昌)이다. 부친 황신량(黃藎良)과 모친 김세중(金世重)의 딸 교하김씨(交河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창녕조씨(昌寧曹氏)이고, 둘째 부인은 남양홍씨(南陽洪氏)이며, 셋째 부인은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조모 김씨(金氏)의 슬하에서 자랐다.
처음 김기연(金起淵)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하였고, 이후 화암(和巖) 장세량(張世良)의 문하에서 경학(經學)을 가르침 받았는데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대의(大義)를 통달하였다. 또 성리서(性理書)를 두루 연구하여 스스로 깨달은 바가 많았다. 당시 관찰사 이세재(李世載)가 명성을 듣고 찾아와 만나보고는 손수 필사(筆寫)한 『심경(心經)』을 주며 격려하였다.
1726년(영조 2) 식년시 생원 2등 21위로 합격하였고, 1728년(영조 4) 평안도 별시1 병과 3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1729년(영조 5)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등을 거쳐 영남추쇄관(嶺南推刷官)으로 나가게 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전적(典籍)‧직강(直講) 등을 거쳐 홍원현감(洪原縣監)으로 나갔는데 그해 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남쪽 지방에서 곡식을 구하여 구휼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 교유(校儒)들의 생업을 돕고, 퇴청(退廳)하면 여러 학생들을 불러 경의(經義)를 강론(講論)하였으며, 배우려는 사람이 있으면 때를 가리지 않고 만나보고 『소학(小學)』 등 여러 서적으로 가르쳤다. 비록 천민의 자식이라도 책을 끼고 배우고자 하면 반드시 찾아와 배우도록 하여 향리에서는 ‘훈장태수(訓長太守)’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향년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황진돈(黃㬐暾)이다.
묘는 평안남도 평양(平壤)에 있다.
증조부는 황윤원(黃胤遠)이고, 조부는 황대창(黃戴昌)이다. 부친 황신량(黃藎良)과 모친 김세중(金世重)의 딸 교하김씨(交河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창녕조씨(昌寧曹氏)이고, 둘째 부인은 남양홍씨(南陽洪氏)이며, 셋째 부인은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조모 김씨(金氏)의 슬하에서 자랐다.
처음 김기연(金起淵)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하였고, 이후 화암(和巖) 장세량(張世良)의 문하에서 경학(經學)을 가르침 받았는데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대의(大義)를 통달하였다. 또 성리서(性理書)를 두루 연구하여 스스로 깨달은 바가 많았다. 당시 관찰사 이세재(李世載)가 명성을 듣고 찾아와 만나보고는 손수 필사(筆寫)한 『심경(心經)』을 주며 격려하였다.
1726년(영조 2) 식년시 생원 2등 21위로 합격하였고, 1728년(영조 4) 평안도 별시1 병과 3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1729년(영조 5)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등을 거쳐 영남추쇄관(嶺南推刷官)으로 나가게 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전적(典籍)‧직강(直講) 등을 거쳐 홍원현감(洪原縣監)으로 나갔는데 그해 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남쪽 지방에서 곡식을 구하여 구휼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 교유(校儒)들의 생업을 돕고, 퇴청(退廳)하면 여러 학생들을 불러 경의(經義)를 강론(講論)하였으며, 배우려는 사람이 있으면 때를 가리지 않고 만나보고 『소학(小學)』 등 여러 서적으로 가르쳤다. 비록 천민의 자식이라도 책을 끼고 배우고자 하면 반드시 찾아와 배우도록 하여 향리에서는 ‘훈장태수(訓長太守)’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향년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황진돈(黃㬐暾)이다.
묘는 평안남도 평양(平壤)에 있다.
[참고문헌]
西堂私載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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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