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위(趙漢緯)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D55CC704B1679X0 |
자(字) | 공서(公西) |
생년 | 1679(숙종 5) |
졸년 | 1740(영조 16)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풍양(豊壤)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한위(趙漢緯)
1679년(숙종 5)∼1740년(영조 16).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공서(公西)이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증조부는 조내양(趙來陽)이고, 조부는 조지헌(趙持憲)이다. 부친 조명인(趙命仁)과 모친 이광직(李光稷)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부는 이정(李渟)이다.
1726년(영조 2)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27년(영조 3) 사헌부지평이 된 후 부수찬‧사간을 여러 차례 역임한 뒤 승지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사헌부지평에 재임하면서 왕실의 제수(祭需) 운용의 문제점을 비판하였으며, 홍문관수찬으로 있을 때 종실의 죄를 주청하다가 강진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731년(영조 7) 중앙으로 돌아온 뒤, 호서 지역의 부족한 진휼곡을 늘리는 등 지방정치의 시정책을 건의하였으며, 관북어사로 파견되어 암행했던 관북 북로의 산천에 대한 지도를 그려내어 지형에 따른 정책시행안도 함께 진상하였다.
증조부는 조내양(趙來陽)이고, 조부는 조지헌(趙持憲)이다. 부친 조명인(趙命仁)과 모친 이광직(李光稷)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부는 이정(李渟)이다.
1726년(영조 2)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27년(영조 3) 사헌부지평이 된 후 부수찬‧사간을 여러 차례 역임한 뒤 승지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사헌부지평에 재임하면서 왕실의 제수(祭需) 운용의 문제점을 비판하였으며, 홍문관수찬으로 있을 때 종실의 죄를 주청하다가 강진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731년(영조 7) 중앙으로 돌아온 뒤, 호서 지역의 부족한 진휼곡을 늘리는 등 지방정치의 시정책을 건의하였으며, 관북어사로 파견되어 암행했던 관북 북로의 산천에 대한 지도를 그려내어 지형에 따른 정책시행안도 함께 진상하였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司馬榜目
英祖實錄
國朝榜目
司馬榜目
[집필자]
김성욱
수정일 | 수정내역 |
---|---|
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