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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항(張緯恒)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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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천응(天應)
호(號)와은(臥隱)
생년1678(숙종 4)
졸년1747(영조 23)
시대조선중기
본관인동(仁同[2])
활동분야호국 > 의병

[상세내용]

장위항(張緯恒)
1678년(숙종 4)∼1747년(영조 23). 조선 중기 의병‧문신. 자는 천응(天應)이고, 호는 와은(臥隱)이다. 본관은 인동(仁同[2])이고,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주(榮州)이다.

증조부는 장용경(張龍慶)이고, 조부는 장연(張璉)이다. 부친은 장옥상(張玉相)과 모친 이세구(李世龜)의 딸 선성이씨(宣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도계(李道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금강(錦江) 장진(張璶)과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의 문인이기도 하다.

1705년(숙종 31) 식년시 생원 3등 15위로 합격하였고, 1727년(영조 3) 증광시 병과 9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사과(司果)로 있을 때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켰다. 1731년(영조 7) 전적(典籍), 1732년(영조 8) 감찰(監察), 1733년(영조 9) 외직으로 자인현감(慈仁顯監)에 제수되어 난으로 인해 어지러운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만년에는 고향 운곡(雲谷)에 서재를 짓고 제자들과 우이구곡(宇夷九曲)을 모방하여 시를 짓고 화답하며, 옛날 성현들의 책을 강론하였다.

문집으로 『와은선생문집(臥隱先生文集)』이 있는데, 증손 장성구(張成矩) 1767년(영조 43)에 편집하고, 7대손 장사후(張師厚)가 1897년(광무 1)에 간행하였다. 문집 가운데에는 퇴계 이황과 주자의 시에 차운한 시, 서원에 사액해줄 것을 청하는 내용과 이인좌의 난 이후 영남유생에 대한 차별을 호소하는 내용의 상소문, 자인현의 유생들에게 제(製)와 강(講)을 권하는 한편 사색당파가 만연한 당시의 풍토를 개탄한 잡저 「자인경내고유문(慈仁境內告由文)」 등이 있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