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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진기(郭鎭基)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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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안(士安)
생년1676(숙종 2)
졸년1741(영조 17)
시대조선중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곽진기(郭鎭基)
1676년(숙종 2)∼1741년(영조 17) 11월 7일.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안(士安)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곽지흠(郭之欽)이고, 조부는 곽창징(郭昌徵)이다. 부친 곽만적(郭萬績)과 모친 우창하(禹昌夏)의 딸 단양우씨(丹陽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유홍문(兪弘文)의 딸 기계유씨(杞溪兪氏)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후덕하였으며, 효성스러워 부모를 잘 섬겼다.

1702년(숙종 28) 식년시 진사 3등 6위로 합격하였고, 1723년(경종 3) 명릉참봉(明陵參奉)에 임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726년(영조 2) 혜릉참봉(惠陵參奉)에 임용된 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등을 거쳐 함창현감(咸昌縣監)으로 나아갔는데,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표방하여 ‘향약 10여 조(條)’를 지어 고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736년(영조 12)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정선군수(旌善郡守)로 나아가 임금의 지시사항을 신중히 지키고 벌목(伐木)을 엄중히 다스리다가 조정에 인맥이 닿는 사람으로 인해 당시 재상의 노여움을 받아 파직하고 돌아왔다.

향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곽성제(郭聖濟)이다.

묘는 경기도 부평(富平)에 있다.

[참고문헌]

西堂私載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