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태(李重泰)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911D0DCB1671X0 |
자(字) | 성관(聖觀) |
생년 | 1675(숙종 1)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부 | 이덕령(李德齡) |

[상세내용]
이중태(李重泰)
1675년(숙종 1)~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성관(聖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부는 이명익(李命益)이고, 조부는 이진원(李震瑗)이며, 부친은 이덕령(李德齡)이다. 외조부는 민광소(閔光熽)이다.
1710년(숙종 36) 증광시에서 진사 2등 5위로 합격하였다. 관직은 내섬시봉사(內贍寺奉事)‧풍덕부사(豊德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723년(경종 3) 정승들과 비변사(備邊司)의 신하들이 녹훈(錄勳)에 대하여 논의하였는데, 이때 비판을 받고 파면되었다. 1736년(영조 12) 숙종이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우(祠宇) 지덕사(至德祠)를 건립하면서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빠뜨렸는데, 양녕대군 사우에 효령대군의 사우를 건립하고 편액(扁額)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 처리하겠노라는 답을 내렸다. 1740년(영조 16) 풍덕부사로 나가 있을 때, 영조가 제릉(齊陵: 태조의 정비(正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후릉(厚陵: 정종(定宗)과 정종비(定宗妃)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에 행차하여 의식대로 친제(親祭)를 행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풍덕의 행궁(行宮)에 도착하였다. 이때 영조가 어사(御史) 김상적(金尙迪)을 통해, 그가 관아 푸줏간에 소를 잡아 늘어놓고, 40여 그릇에 다담(茶啖: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차리는 다과)을 준비하여 임금의 어가를 수행한 재상과 대신들에게 아첨하였으며 군교(軍校)가 제멋대로 행동하여 죽은 백성들의 억울한 송사(訟事)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고 미룬 일들을 전해 들었다. 이에 체포되어 곤장을 맞고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졌다.
증조부는 이명익(李命益)이고, 조부는 이진원(李震瑗)이며, 부친은 이덕령(李德齡)이다. 외조부는 민광소(閔光熽)이다.
1710년(숙종 36) 증광시에서 진사 2등 5위로 합격하였다. 관직은 내섬시봉사(內贍寺奉事)‧풍덕부사(豊德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723년(경종 3) 정승들과 비변사(備邊司)의 신하들이 녹훈(錄勳)에 대하여 논의하였는데, 이때 비판을 받고 파면되었다. 1736년(영조 12) 숙종이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우(祠宇) 지덕사(至德祠)를 건립하면서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빠뜨렸는데, 양녕대군 사우에 효령대군의 사우를 건립하고 편액(扁額)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 처리하겠노라는 답을 내렸다. 1740년(영조 16) 풍덕부사로 나가 있을 때, 영조가 제릉(齊陵: 태조의 정비(正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후릉(厚陵: 정종(定宗)과 정종비(定宗妃)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에 행차하여 의식대로 친제(親祭)를 행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풍덕의 행궁(行宮)에 도착하였다. 이때 영조가 어사(御史) 김상적(金尙迪)을 통해, 그가 관아 푸줏간에 소를 잡아 늘어놓고, 40여 그릇에 다담(茶啖: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차리는 다과)을 준비하여 임금의 어가를 수행한 재상과 대신들에게 아첨하였으며 군교(軍校)가 제멋대로 행동하여 죽은 백성들의 억울한 송사(訟事)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고 미룬 일들을 전해 들었다. 이에 체포되어 곤장을 맞고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졌다.
[참고문헌]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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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