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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필(李廷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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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양보(良甫)
생년1672(현종 13)
졸년1735(영조 11)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이상백(李相伯)

[상세내용]

이정필(李廷弼)
1672년(현종 13)~1735년(영조 11).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태보(台甫)‧양보(良甫)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10대손으로 증조부는 이민후(李敏厚)이고, 조부는 이제두(李齊杜)이며,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이상백(李相伯)이다. 외조부는 최일(崔逸)이고, 처부는 강택규(姜宅揆)이다. 형은 이정걸(李廷傑)이고, 동생은 이정일(李廷一)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시에 진사 1등 3위로 합격하였고, 1709년(숙종 35) 성균관 유생들이 보는 시험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1710년(숙종 36) 증광시에서 병과 3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1724년(경종 4) 2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1724년(경종 4) 윤용(尹容)이 이사상(李師尙)을 탄핵하였을 때,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고 사헌부지평으로 윤용을 탄핵하고 관직을 빼앗을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이때의 사관은 명성을 쫓느라 김일경에게 붙었으니 책망할 가치도 없다고 하였다. 같은 해 5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또 같은 해 7월 사헌부집의 이진순(李眞淳)의 ‘시전(市廛) 사람을 강제로 가두고 그들이 가진 베를 속공(屬公)하였으며, 관아에 출근하지 않고 하리(下吏)만 내보내 불법행위를 단속하는 등의 물의를 일으켰다’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724년(경종 4) 10월 12일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1727년(영조 3) 7월 세자시강원필선이 되었고 11월 승정원승지가 되었다. 1728년(영조 4) 청의(淸議)에 죄를 지어 합천군수로 좌천되었을 때인 3월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부응하여 영남의 정희량(鄭希亮)이 합세하였을 때 정희량의 영남군이 대규모라는 사실을 알고 3월 22일 진주(晉州)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런데 이후 도망친 것이 아니라 증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3월 26일 진주로 갔다가 길이 엇갈린 것이라 보고하였지만 인평군(仁平君) 이보혁(李普赫)과 당시 영남안무사 박사수(朴師洙) 등과의 진술 내용이 엇갈리면서 종신토록 벼슬길이 막히게 되었다.

1734년(영조 10) 아들 이인휘(李寅徽)가 북을 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1745년(영조 21) 정시에 병과 4위로 문과 급제한 아들 이준휘(李儁徽) 또한 소장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신원되지 않았다.

슬하에 아들 이인휘‧이준휘를 두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