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석(吳玄錫)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624D604C11DB1646X0 |
자(字) | 계휴(啓休) |
생년 | 1646(인조 24) |
졸년 | 1708(숙종 3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나주(羅州) |
활동분야 | 학생 > 유생 |


[상세내용]
오현석(吳玄錫)
1646년(인조 24)∼1708년(숙종 34). 조선 중기 사인. 자는 계휴(啓休)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출신지는 전라남도 나주이다.
나성군(羅城君) 양평공(襄平公) 오자치(吳自治)의 후손으로, 조부는 충의위(忠義衛) 병조좌랑(兵曹佐郞) 오희유(吳希有)이다. 부친 통훈대부(通訓大夫) 병조좌랑 오이익(吳以翼)과 모친 참봉(參奉) 홍치경(洪致慶)의 딸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 오붕석(吳朋錫)이 있다. 부인은 참봉 임교(林嶠)의 딸 평택임씨(平澤林氏)이다.
12세부터 정식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부지런히 학업을 닦아 또래 중에서 뛰어났다. 장성하여서는 더욱 분발하여 학문으로 이름을 드날려서 명곡서실(明谷書室)에서 공부하였다. 명곡서실은 인가(人家)가 없는 숲 속에 자리하고 있어 다른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어 하였으나, 오현석(吳玄錫)은 3년 동안 끈질기게 공부하여 문장이 크게 발전하였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 나이 20세도 안되었는데,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학업을 멈추지 않아 주변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이때 가래가 끓는 병을 얻어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으며, 가래가 끓는 병을 20년 동안 앓았다.
1691년(숙종 17) 증광시 생원 2등 17위로 합격하였으나, 대과에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날마다 옛 성현들의 책을 읽고 아침저녁으로 암송을 하였는데, 특히 주자서(朱子書)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드물게 시를 짓기도 하였다. 마을 문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고, 만년에는 집에서 자식들 교육에 힘썼으며, 재산을 늘리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오대빈(吳大斌)‧오대훈(吳大勛)‧오대준(吳大濬)‧오대운(吳大運)이다.
나성군(羅城君) 양평공(襄平公) 오자치(吳自治)의 후손으로, 조부는 충의위(忠義衛) 병조좌랑(兵曹佐郞) 오희유(吳希有)이다. 부친 통훈대부(通訓大夫) 병조좌랑 오이익(吳以翼)과 모친 참봉(參奉) 홍치경(洪致慶)의 딸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 오붕석(吳朋錫)이 있다. 부인은 참봉 임교(林嶠)의 딸 평택임씨(平澤林氏)이다.
12세부터 정식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부지런히 학업을 닦아 또래 중에서 뛰어났다. 장성하여서는 더욱 분발하여 학문으로 이름을 드날려서 명곡서실(明谷書室)에서 공부하였다. 명곡서실은 인가(人家)가 없는 숲 속에 자리하고 있어 다른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어 하였으나, 오현석(吳玄錫)은 3년 동안 끈질기게 공부하여 문장이 크게 발전하였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 나이 20세도 안되었는데,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학업을 멈추지 않아 주변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이때 가래가 끓는 병을 얻어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으며, 가래가 끓는 병을 20년 동안 앓았다.
1691년(숙종 17) 증광시 생원 2등 17위로 합격하였으나, 대과에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날마다 옛 성현들의 책을 읽고 아침저녁으로 암송을 하였는데, 특히 주자서(朱子書)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드물게 시를 짓기도 하였다. 마을 문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고, 만년에는 집에서 자식들 교육에 힘썼으며, 재산을 늘리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오대빈(吳大斌)‧오대훈(吳大勛)‧오대준(吳大濬)‧오대운(吳大運)이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杞園集
杞園集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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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