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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상(鄭履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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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642(인조 20)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초계(草溪)
활동분야무신
정시길(鄭時吉)

[상세내용]

정이상(鄭履祥)
1642년(인조 20)~미상.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거주지는 한양(漢陽: 현 서울)이다.

부친은 정시길(鄭時吉)이다.

1670년(현종 11) 별시에 병과 305위로 무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한량(閑良)‧옥천군수(沃川郡守)‧용천부사(龍川府使)‧통제사(統制使)‧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 등을 역임하였다.

1691년(숙종 17) 옥천군수 재임 시절 이웃 고을의 수령들과 진휼과 관련한 상소를 올렸는데, 비변사(備邊司)를 통해 충청북도 충주(忠州) 양진창(楊津倉)의 곡식 1만 석(石)이 영남(嶺南)으로 보내져 진휼(賑恤) 물자로 활용되는 결과를 이끌었다. 1697년(숙종 23) 영부사(領府事) 남구만(南九萬) 등이 18명의 인재를 추천할 때 권시경(權是經)에 의해 추천되었다. 1707년(숙종 33) 통제사 재임 시절에 앞서 임직했던 춘천(春川)으로 다시 부임하게 되었는데, 춘천에서 사사로이 재물을 받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체차(遞差)되었다. 1722년(경종 2)에는 1721년(경종 1) 영종첨사(永宗僉使) 홍시구(洪時九)가 선갑도(先甲島)에서 몰래 돈을 위조하던 황춘선(黃春善)과 변위신(卞煒信) 등을 잡아들이고 그들의 위조기계와 장물(贓物) 등을 수거하여 포도청(捕盜廳)에 보냈는데, 포도대장으로서 사건을 더 깊이 파고들고 군사를 친히 지휘하여 우두머리[窩主]를 잡는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김창집(金昌集)이 나이가 너무 많아 죄인들을 다스리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청하여 체차되었다.

[참고문헌]

庚戌秋文武科別試榜目
肅宗實錄
景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