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섬(閔暹)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BBFCC12CFFFFB1628X0 |
자(字) | 퇴지(退之) |
생년 | 1628(인조 6)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무신 |

부 | 민진량(閔震亮) |

[상세내용]
민섬(閔暹)
1628년(인조 6)~미상. 조선 중기 무신. 자는 퇴지(退之)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거주지는 한양이다.
부친은 민진량(閔震亮)이다.
1651년(효종 2) 별시 무과에 을과 12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상주영장(尙州營將)‧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금군별장(禁軍別將)‧호군(護軍)‧경기수사(京畿水使)‧통제사(統制使) 등을 역임하였다.
1669년(현종 10) 상주영장 시절 무장(武將)으로서 자원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훈련별대(訓練別隊)를 선발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 신문(訊問)을 받았다. 1671년(현종 12) 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사직하려했으나 임금의 만류로 뜻을 거두었다. 그러나 1673년(현종 14) 군병(軍兵)들을 괴롭히고, 친한 사람들에게 군포(軍布)를 나누어주며, 군영(軍營)에서 사적으로 장사를 하는 등 신분을 이용하여 탐욕스럽게 이익을 취하다가 파직되었고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1675년(숙종 1) 재등용되었으나, 1681년(숙종 7) 통제사가 된 후 병을 핑계로 두 번이나 사임을 청하였다가 투고(推考)를 당하였다. 1691년(숙종 17) 삼금(蔘禁)이 행해지던 1649년(인조 27)에 국경을 넘어가 삼을 캐는 사람들을 적발하지 않았다는 오래된 죄를 물어 군역(軍役)에 편입되었다. 1694년(숙종 20) 청백리로 선발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경기수사 재임시절 교동(喬桐)에 별도의 토포사(討捕使)를 설치하는데 힘썼다. 같은 해에 죽은 부인의 장지(葬地)로 통진(通津)의 대촌(大村) 땅을 마음대로 썼다가 파직(罷職)되었다. 1681년(숙종 7) 수군통제사로 재직하던 중,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純信)을 모신 경상남도 통영(統營)의 충렬사(忠烈祠)에 세운 ‘통제사충무이공충렬비(統制使忠武李公忠烈碑)’가 전해진다.
부친은 민진량(閔震亮)이다.
1651년(효종 2) 별시 무과에 을과 12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상주영장(尙州營將)‧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금군별장(禁軍別將)‧호군(護軍)‧경기수사(京畿水使)‧통제사(統制使) 등을 역임하였다.
1669년(현종 10) 상주영장 시절 무장(武將)으로서 자원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훈련별대(訓練別隊)를 선발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 신문(訊問)을 받았다. 1671년(현종 12) 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사직하려했으나 임금의 만류로 뜻을 거두었다. 그러나 1673년(현종 14) 군병(軍兵)들을 괴롭히고, 친한 사람들에게 군포(軍布)를 나누어주며, 군영(軍營)에서 사적으로 장사를 하는 등 신분을 이용하여 탐욕스럽게 이익을 취하다가 파직되었고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1675년(숙종 1) 재등용되었으나, 1681년(숙종 7) 통제사가 된 후 병을 핑계로 두 번이나 사임을 청하였다가 투고(推考)를 당하였다. 1691년(숙종 17) 삼금(蔘禁)이 행해지던 1649년(인조 27)에 국경을 넘어가 삼을 캐는 사람들을 적발하지 않았다는 오래된 죄를 물어 군역(軍役)에 편입되었다. 1694년(숙종 20) 청백리로 선발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경기수사 재임시절 교동(喬桐)에 별도의 토포사(討捕使)를 설치하는데 힘썼다. 같은 해에 죽은 부인의 장지(葬地)로 통진(通津)의 대촌(大村) 땅을 마음대로 썼다가 파직(罷職)되었다. 1681년(숙종 7) 수군통제사로 재직하던 중,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純信)을 모신 경상남도 통영(統營)의 충렬사(忠烈祠)에 세운 ‘통제사충무이공충렬비(統制使忠武李公忠烈碑)’가 전해진다.
[참고문헌]
辛卯別試文武科榜目
顯宗實錄
肅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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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