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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좌(鄭允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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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지원(遲元)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진양(晉陽)
활동분야유학
정이공(鄭怡恭)

[상세내용]

정윤좌(鄭允佐)
생졸년 미상. 조선 후기 유학. 자는 지원(遲元)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고, 거주지는 충청남도 천안(天安)이다.

부친은 정이공(鄭怡恭)이다.

1507년(중종 2) 식년시에 생원 3등 12위에 합격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수학한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이목(李穆) 등 사림파를 제거하였다. 이때 유분(柳汾)‧남계희(南季禧)‧유승연(柳承淵)‧이옥동(李玉同)‧유승종(柳承宗)‧유승숙(柳承淑)‧유풍년(柳豊年)‧최유찬(崔庾贊)‧최철동(崔哲同)‧최거망(崔巨亡) 등과 은밀히 시국에 대해 논한 일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이 일은 1496년(연산군 2) 봄 예산(禮山)의 향시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시호(諡號)를 가지고 책제(策題)를 낸 것에서, ‘김종직의 시호는 처음에 문충(文忠)이라 내렸다가 뒤에 문간(文簡)으로 바꾸었으니, 나쁜 시호를 이미 고칠 수 없다면 아름다운 시호는 고칠 수 있는 것이냐’고 써낸 답안으로 인해 김종직의 일파로 연루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시관(試官)이었던 황인(黃璘)‧유인호(柳仁濠)‧김준손(金俊孫)이 국문(鞠問)을 받았고, 그는 난언죄(亂言罪)로 곤장 1백 대를 맞고 3천리 밖으로 유배(流配)되었으며, 가솔(家率)들은 노예가 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伸寃)이 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