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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지(金驥趾)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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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함흥(咸興)
활동분야문신
외조부양자보(楊自甫)

[상세내용]

김기지(金驥趾)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함흥(咸興)이다.

외조부는 양자보(楊自甫)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시에서 3등 2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1518년(중종 13) 4월에 부령부사(富寧府使)로 재직 중, ‘사람됨이 용렬하여 육진(六鎭)의 초입인 거읍(巨邑)의 부사로 적당치 못하다’는 의견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이 김기지(金驥趾)는 문신으로서 무재가 있고, 수령(守令)을 거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수령에 적합하므로 체직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허락하지 않았다가 다음날 대사헌(大司憲) 이장곤(李長坤)과 정언(正言) 최산두(崔山斗)가 재차 아뢰자 체직을 허용하였다.

1518년(중종 13) 7월에는 서산군수(瑞山郡守)로 재직하였는데, 사간(司諫) 정사룡(鄭士龍)과 장령(掌令) 민수천(閔壽千)이 김기지의 천성이 탐오하므로 수령직을 맡길 수 없다고 탄핵하였고, 이어 이조(吏曹)에서도 대간이 실정을 알고 정확히 논하였을 것이므로 김기지를 체직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1520년(중종 15) 문천군수(文川郡守)로 재직 중 왼쪽 늑골 부분으로 자식을 출산한 이변을 보고하였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집필자]

나영훈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