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관주(吳觀周)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624AD00C8FCB1645X0 |
자(字) | 대관(大觀) |
생년 | 1645(인조 23) |
졸년 | 1664(현종 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해주(海州)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상세내용]
오관주(吳觀周)
1645년(인조 23)∼1664년(현종 5).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대관(大觀)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조부는 오숙(吳䎘)이고, 부친 형조판서(刑曹判書) 증영의정(贈領議政)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과 모친 호조판서(戶曹判書) 숙민공(肅敏公) 민성휘(閔聖徽)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좌랑(佐郞) 오진주(吳晉周)‧오정주(吳鼎周)‧오태주(吳泰周)‧오이주(吳履周)이다. 부인은 승지(承旨) 박세성(朴世城)의 딸 반남박씨(潘南朴氏)이다.
온화한 성품에 품행이 방정하였다. 위엄이 서린 행동거지에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자기 수양에 힘썼다. 『소학(小學)』과 『심경(心經)』을 수양의 지침으로 삼았다. 자신의 언행중 성현(聖賢)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해 두었다가 날마다 되새겨보고 성찰하였다.
1662년(현종 3) 증광시 생원 3등 61위로 합격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려서 모친을 잃고 계모(繼母) 김씨(金氏)를 친모처럼 따르며 성심을 다하였다. 계모가 병환이 들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직접 수발을 들며 병간호를 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자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결국 상을 당하게 되었는데 애통해하는 모습에 주위 사람들도 슬퍼하였다. 상을 치르며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서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쓰러진 후 20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동생 오진주의 아들 오완(吳琬)을 양자로 들였다.
조부는 오숙(吳䎘)이고, 부친 형조판서(刑曹判書) 증영의정(贈領議政)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과 모친 호조판서(戶曹判書) 숙민공(肅敏公) 민성휘(閔聖徽)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좌랑(佐郞) 오진주(吳晉周)‧오정주(吳鼎周)‧오태주(吳泰周)‧오이주(吳履周)이다. 부인은 승지(承旨) 박세성(朴世城)의 딸 반남박씨(潘南朴氏)이다.
온화한 성품에 품행이 방정하였다. 위엄이 서린 행동거지에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자기 수양에 힘썼다. 『소학(小學)』과 『심경(心經)』을 수양의 지침으로 삼았다. 자신의 언행중 성현(聖賢)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해 두었다가 날마다 되새겨보고 성찰하였다.
1662년(현종 3) 증광시 생원 3등 61위로 합격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려서 모친을 잃고 계모(繼母) 김씨(金氏)를 친모처럼 따르며 성심을 다하였다. 계모가 병환이 들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직접 수발을 들며 병간호를 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자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결국 상을 당하게 되었는데 애통해하는 모습에 주위 사람들도 슬퍼하였다. 상을 치르며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서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쓰러진 후 20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동생 오진주의 아들 오완(吳琬)을 양자로 들였다.
[참고문헌]
屛溪集
朝鮮人名辭書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朝鮮人名辭書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 | 수정내역 |
---|---|
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