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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징(申啓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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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시(聖時)
생년1632(인조 10)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고령(高靈)
활동분야관리
신즐(申瀄)

[상세내용]

신계징(申啓澄)
1632년(인조 10)~미상. 조선 중기 관리. 자는 성시(聖時)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호조좌랑(行戶曹佐郞) 신즐(申瀄)이다. 형은 신응징(申應澄)이고, 동생은 신희징(申喜澄)이다.

1650년(효종 1) 증광시에서 생원 2등 7위로 합격하였다.

1666년(현종 7)에 이선악(李宣岳) 등과 함께 부솔(副率) 및 시직(侍直)의 의망에 들었는데, 집의(執義) 이익(李翊) 등으로부터 해당 사안이 품계의 질서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되어 명령이 취소되었다. 1675년(숙종 1)에는 임실현감(任實縣監)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전라도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 박태상(朴泰尙)을 통해 그의 실정(失政)이 드러나 파직이 건의되었다. 한편, 유학(幼學) 이만형(李萬亨)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신계징(申啓澄)은 예법(禮法)에 해박하여 복제도(服制圖)를 만들기까지 하였던 자이고, 행실이 올바른 선비라며, 선처를 호소하였다. 그 뒤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사후에 조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 문제로 인하여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송상민(宋尙敏)이 송시열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으로부터 내용이 무례하다는 지적을 받아서 투옥되어 국문(鞠問)을 당하였다. 이후 송상민에 대한 형신(刑訊)이 거듭되었고, 송상인이 작성한 상소문을 두고 문자의 가부(可否)를 맡았던 자로 지목되었다. 그 결과 1679년(숙종 5)에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고, 심문 도중 송상민의 상소를 제지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뜻이 어긋나자 즉시 절교하였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가 송시열의 고족제자(高足弟子가)인 점을 비롯하여 의심스러운 점들이 많다는 이유로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