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형(金克亨)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ADF9D615B1605X0 |
자(字) | 태숙(泰叔) |
호(號) | 운촌(雲村) |
생년 | 1605(선조 38) |
졸년 | 1663(현종 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청풍(淸風) |
활동분야 | 성리학자 |

부 | 김인백(金仁伯) |

[상세내용]
김극형(金克亨)
1605년(선조 38)~1663년(현종 4). 조선 중기 성리학자. 자는 태숙(泰叔)이고, 호는 사천(沙川)‧운촌(雲村)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부친은 학생(學生) 김인백(金仁伯)이다.
그는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으로 1630년(인조 8) 사마시(司馬試)에 생원 3등 2위로 입격하였다. 같은 해에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종묘에 모실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충청도 산골로 피신하였으며,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인조 15)에 학행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 공조정랑 등에 제수되었으며, 59세 때 화순현감(和順縣監)에 나아갔으며, 부임한 후에 백성을 구휼하였다.
윤휴(尹鑴)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특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성선체용설(性善體用說)에 대하여 서간을 통해 논쟁하였다.
아들은 감지당(坎止堂) 김징(金澄)이고, 손자는 우의정 김구(金構)이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에 있으며, 그의 두 부인인 광주정씨(光州鄭氏)와 청송심씨(靑松沈氏)가 묘역에 함께 있다.
김씨 3대의 시문집인 『청풍세고(淸風世稿)』가 전한다.
부친은 학생(學生) 김인백(金仁伯)이다.
그는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으로 1630년(인조 8) 사마시(司馬試)에 생원 3등 2위로 입격하였다. 같은 해에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종묘에 모실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충청도 산골로 피신하였으며,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인조 15)에 학행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 공조정랑 등에 제수되었으며, 59세 때 화순현감(和順縣監)에 나아갔으며, 부임한 후에 백성을 구휼하였다.
윤휴(尹鑴)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특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성선체용설(性善體用說)에 대하여 서간을 통해 논쟁하였다.
아들은 감지당(坎止堂) 김징(金澄)이고, 손자는 우의정 김구(金構)이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에 있으며, 그의 두 부인인 광주정씨(光州鄭氏)와 청송심씨(靑松沈氏)가 묘역에 함께 있다.
김씨 3대의 시문집인 『청풍세고(淸風世稿)』가 전한다.
[참고문헌]
[집필자]
나영훈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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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