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여후망(呂後望)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5ECD6C4B9DDB1591X0
자(字)문보(文輔)
생년1591(선조 24)
졸년1631(인조 9)
시대조선중기
본관성산(星山)
활동분야유생
여기서(呂麒瑞)

[상세내용]

여후망(呂後望)
1591년(선조 24)~1631년(인조 9). 조선 중기 유생. 자는 문보(文輔)이다.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부친은 선무랑(宣務郞) 여기서(呂麒瑞)이다. 동생은 여후상(呂後尙)이다.

1616년(광해군 8) 증광시에서 생원 3등 49위로 입격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관학유생들이 인목대비가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하였고,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金悌男)을 사주하여 왕을 바꾸려는 역모를 꾀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일이 있었다. 여후망(呂後望)은 관학유생으로서 이 상소에 참여하였다. 또한 진사 오운(吳霣), 유학 정사길(鄭士吉) 등과 함께 대북의 영수 정인홍(鄭仁弘) 편에서 서서 인목대비를 옹호한 기자헌(奇自獻)‧이항복(李恒福) 등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폐모론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죽임을 면하였다. 1631년(인조 9) 권대진(權大進)‧최현(崔睍)‧천식(天植) 등이 일으킨 모반에 참여하려 하였다는 이유로 잡혀와 심문을 당하였다. 심문 도중 죄를 자복하여 처형되었고, 가족까지 연좌되어 부친이 처형되었다. 또한 역적이 나왔다는 이유로 그의 본관인 거창(居昌)은 성산현(星山縣)으로 강등되었으며, 수령이 파직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