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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립(曺梃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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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이정(以正)
호(號)오계(梧溪)
생년1583(선조 16)
졸년1660(현종 1)
시대조선중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조응인(曺應仁)

[상세내용]

조정립(曺梃立)
1583년(선조 16)∼1660년(현종 1) 9월.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이정(以正)이고, 호는 오계(梧溪)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출신지는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이다.

부친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인 도촌(陶村) 조응인(曺應仁)이다.

부친을 따라 조식(曺植)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후 종숙(從叔)인 조우인(曺友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증광시에서 생원 3등 5위로 합격하였고, 1609년(광해군 1) 증광시에 병과 19위로 급제하였다. 급제 이후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지평(持平) 및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등 청요직을 두루 지냈다. 이후에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주장할 때 반대를 하다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좌천되었고, 다시 영덕현령(盈德縣令)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신산서원(新山書院)에 조식을 배향하는 데 참여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는 오히려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보은(報恩)으로 귀양을 갔다.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에 평양서윤‧성주목사‧정주목사를 지냈으며 평양과 정주에서는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다.

벼슬을 은퇴하고 난 이후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 원장을 지냈고, 합천에 봉서정(鳳棲亭)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썼다.

슬하에 아들 조시량(曺時亮)을 두었다.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에 부친 조응인과 조정립의 사당인 도촌별묘(陶村別廟)가 있다.

저서로는 『오계선생문집(梧溪先生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경남일보(2002.9.2)
紀年便考

[집필자]

이민재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