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여눌(安汝訥)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548C5ECB20CB1575X0 |
자(字) | 근숙(謹叔) |
생년 | 1575(선조 8)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순흥(順興) |
활동분야 | 무신 |
부 | 안등(安騰) |
[상세내용]
안여눌(安汝訥)
1575년(선조 8)~미상. 조선 중기 무신. 자는 근숙(謹叔)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부친은 장사랑(將士郞) 안등(安騰)이고, 형은 안여심(安汝諶)‧안여성(安汝誠)‧안여순(安汝諄)이다. 부인은 김옥지(金玉只)이다.
1601년(선조 34) 식년시 무과에 갑과 3위로 급제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평안도우후(平安道虞候)로서 창성(昌城)에 주둔하여 변방을 지켰고, 같은 해 청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명을 공격하자 명은 흠차경략요동등처군무병부좌시랑(欽差經略遼東等處軍務兵部左侍郞) 겸 도찰원우첨도어사(兼都察院右僉都御史) 양호(楊鎬)를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5도도원수(五道都元帥) 강홍립 휘하의 중군관(中軍官)으로서 출정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강홍립의 원군은 대패하였고, 현장에서의 상황에 따라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청에 투항하였는데, 이때 안여눌(安汝訥)도 이일원(李一元)‧문희성(文希聖)‧박난영(朴蘭英)‧정응정(鄭應井)‧김원복(金元福)‧오신남(吳信男) 등과 함께 항복하였다. 항복한 장수 대부분은 달아나지 못하고 굶어죽거나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같은 해 도승지 한찬남(韓纘男)이 안여눌의 처가 종 세은동(世隱同)과 간통하다 체포되어 포도청에 잡혀있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김옥지와 세은동을 국문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는 엄히 다스려졌다.
부친은 장사랑(將士郞) 안등(安騰)이고, 형은 안여심(安汝諶)‧안여성(安汝誠)‧안여순(安汝諄)이다. 부인은 김옥지(金玉只)이다.
1601년(선조 34) 식년시 무과에 갑과 3위로 급제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평안도우후(平安道虞候)로서 창성(昌城)에 주둔하여 변방을 지켰고, 같은 해 청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명을 공격하자 명은 흠차경략요동등처군무병부좌시랑(欽差經略遼東等處軍務兵部左侍郞) 겸 도찰원우첨도어사(兼都察院右僉都御史) 양호(楊鎬)를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5도도원수(五道都元帥) 강홍립 휘하의 중군관(中軍官)으로서 출정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강홍립의 원군은 대패하였고, 현장에서의 상황에 따라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청에 투항하였는데, 이때 안여눌(安汝訥)도 이일원(李一元)‧문희성(文希聖)‧박난영(朴蘭英)‧정응정(鄭應井)‧김원복(金元福)‧오신남(吳信男) 등과 함께 항복하였다. 항복한 장수 대부분은 달아나지 못하고 굶어죽거나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같은 해 도승지 한찬남(韓纘男)이 안여눌의 처가 종 세은동(世隱同)과 간통하다 체포되어 포도청에 잡혀있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김옥지와 세은동을 국문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는 엄히 다스려졌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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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