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인(金守訒)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218C778B1563X0 |
자(字) | 군신(君愼) |
호(號) | 구봉(九峰) |
생년 | 1563(명종 18) |
졸년 | 1626(인조 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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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김태을(金太乙) |
외조부 | 김휘(金輝) |
저서 | 『구봉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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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김수인(金守訒)
1563년(명종 18)∼1626년(인조 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신(君愼), 호는 구봉(九峰).
부친은 강릉참봉(康陵參奉) 김태을(金太乙)이며, 모친은 의성김씨로 참봉 김휘(金輝)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작은아버지 김태허(金太虛)가 울산군수로 화왕산(火旺山)을 지키고 있을 때 옆에서 계책을 세워 많은 전공을 세우게 했다.
1603년 사마시에 합격, 태학(太學)에 있을 때 장의(掌議)의 신분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광해군을 간하기 위하여 「전은소(全恩疏)」를 올리고, 석고대죄한 지 7일 만에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다시 태학으로 돌아왔다.
평생에 『논어』와 『대학』을 읽어 성(誠)과 경(敬)으로써 일신의 수양지침을 삼았고, 성리학은 정구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였다. 정경세(鄭經世)‧이윤우(李潤雨) 등과 교유하였다. 울산 덕양사(德陽祠)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구봉문집』 4권 2책이 있다.
부친은 강릉참봉(康陵參奉) 김태을(金太乙)이며, 모친은 의성김씨로 참봉 김휘(金輝)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작은아버지 김태허(金太虛)가 울산군수로 화왕산(火旺山)을 지키고 있을 때 옆에서 계책을 세워 많은 전공을 세우게 했다.
1603년 사마시에 합격, 태학(太學)에 있을 때 장의(掌議)의 신분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광해군을 간하기 위하여 「전은소(全恩疏)」를 올리고, 석고대죄한 지 7일 만에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다시 태학으로 돌아왔다.
평생에 『논어』와 『대학』을 읽어 성(誠)과 경(敬)으로써 일신의 수양지침을 삼았고, 성리학은 정구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였다. 정경세(鄭經世)‧이윤우(李潤雨) 등과 교유하였다. 울산 덕양사(德陽祠)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구봉문집』 4권 2책이 있다.
[참고문헌]
司馬榜目
九峰文集
九峰文集
[집필자]
박성학(朴性學)
명 : "수인(守訒)"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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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