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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남(朴從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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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선술(善述)
호(號)유촌(柳村)
생년1559(명종 14)
졸년1620(광해군 12)
시대조선중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무신 > 무신

[상세내용]

박종남(朴從男)
1559년(명종 14)(주1)
생년
본인의 무과 단회방목을 참고하여 생년을 무오(1558)에서 기미(1559)로 수정함.
∼1620년(광해군 12). 조선 중기 무신‧의병. 자는 선술(善述)이고, 호는 유촌(柳村)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경상북도 의흥(義興) 쌍정리(雙亭里)이다.

증조부는 후릉참봉(厚陵參奉) 박형손(朴亨孫)이고, 조부는 무계공(舞溪公) 박민수(朴敏樹)이며, 부친은 선릉침랑(宣陵寢郞) 박응희(朴應禧)이다. 외조부는 신천강씨(信川康氏)이다. 부인은 생원 박전(朴銓)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있고 뜻이 커서 일찍이 주먹을 휘두르고 탄식하며, “남아로 태어나서 화살과 말을 쫓아 세상에 큰 공을 세워야지 어찌 늙은 서생을 본받아 붓과 벼루 사이에서 글만 읽겠는가?”하였다. 더 자라서는 마침내 붓을 집어 던지고, 1591년(선조 24) 무과에 합격하였다.

1592년(선조 25) 남쪽에서 일본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오자 많은 군읍의 사람들이 쳐들어오는 모습만 보고도 흩어져 달아나던 때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가 경상북도 현풍(玄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죽을 힘을 다하여 적을 물리쳤다.

1597년(선조 30) 일본이 다시 쳐들어오자 곽재우와 함께 경상남도 창녕군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모였는데, 성에는 도내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많아 피로써 동맹을 맺고 성가퀴에 올라 죽기를 맹세하니 성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일본군도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지금 『창의록(倡義錄)』 일부가 세상에 전한다고 한다. 난이 평정된 후에 서울에서 무반의 청직(淸職)을 지냈으며 얼마 있다가 변방으로 나아가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의병장 이눌(李訥)이 쓴 『낙의재유집』의 「팔공산제의장회맹록(八公山諸義將會盟錄)」에 당시 화왕산성에서 회맹에 참여했던 명단이 있다.

[참고문헌]

霽山集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7-26본인의 무과 단회방목을 참고하여 생년을 수정함.[수정자: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