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흘(李屹)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74D758FFFFB1557X0 |
자(字) | 산립(山立) |
호(號) | 노파(盧坡) |
생년 | 1557(명종 12) |
졸년 | 1627(인조 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벽진(碧珍)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상세내용]
이흘(李屹)
1557년(명종 12)∼1627년(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주1)
. 자는 산립(山立), 호는 노파(盧坡). 지중추부사 이약동(李約東)의 후손이다.
일찍이 문재가 뛰어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늙음에 곁을 떠나지 않고 봉양하기로 결심하여 과업을 포기하였다. 그의 행의(行誼)를 정온(鄭薀)이 조정에 알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
그뒤 구성부사‧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다.
한편, 1613년(광해군 5)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고 한다는 무고로 사사(賜死)된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많은 핍박을 받았다.
구성부사로 나갈 때는 이러한 자에게 관방(關防)을 맡기면 민심이 흩어질 것이니 아예 벼슬을 못하게 하여야 한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삼가(三嘉)의 고암사우(古巖祠宇)에 제향되었다.
본관 |
碧珍李氏大同譜를 참고하여 본관을 성주(星州)에서 벽진(碧珍)으로 수정함. |
일찍이 문재가 뛰어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늙음에 곁을 떠나지 않고 봉양하기로 결심하여 과업을 포기하였다. 그의 행의(行誼)를 정온(鄭薀)이 조정에 알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
그뒤 구성부사‧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다.
한편, 1613년(광해군 5)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고 한다는 무고로 사사(賜死)된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많은 핍박을 받았다.
구성부사로 나갈 때는 이러한 자에게 관방(關防)을 맡기면 민심이 흩어질 것이니 아예 벼슬을 못하게 하여야 한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삼가(三嘉)의 고암사우(古巖祠宇)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桐溪集
燃藜室記述
桐溪集
[집필자]
장필기(張弼基)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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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1-09-26 | 동계집(桐溪集)을 참고하여 호 노파(盧坡)를 노파(蘆坡)로 수정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