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사열(元士悅)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6D0C0ACC5F4B1554X0 |
자(字) | 태이(兌而) |
생년 | 1554(명종 9)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원주(原州) |
활동분야 | 문신 |

부 | 원순보(元純輔) |

[상세내용]
원사열(元士悅)
1554년(명종 9)~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태이(兌而)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거주지는 한양(漢陽: 현 서울)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원맹수(元孟穟)의 4세손으로,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전행장례원사의(前行掌隷院司議) 원순보(元純輔)이다.
1588년(선조 21) 식년시에 생원 3등 35위로 합격하였다. 관직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선조 40) 감찰로 재임하던 중, 사헌부 관료들이 혜민서(惠民署)에서 차를 마시며 업무를 의논하던 다시(茶時)에 자신의 종과 승지(承旨) 박진원(朴震元)의 종이 다툼이 있었는데, 평소 음주를 즐겼던 원사열(元士悅)은 공청(公廳)에서 만취한 상태로 자신의 종이 하소연을 듣고선 화를 내며 금부나장(禁府羅將)에게 명하여 박진원의 종을 잡아들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당상관(堂上官) 시종신(侍從臣) 박진원의 집에 금부나장을 풀어 종을 잡아들인 일은 경우에 어긋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결국 파직되었다. 이후 사헌부에서 원사열의 사건에 함께 연루된 박진원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와 관련하여, 윤허되지는 않았으나, 이 탄핵을 반대하여 정언(正言) 기협(奇協)을 비롯한 행대사간(行大司諫) 홍식(洪湜)‧정언 이호신(李好信)‧사간(司諫) 조탁(曺倬)‧헌납(獻納) 유성(柳惺)‧대사헌(大司憲) 황섬(黃暹)‧장령(掌令) 민여임(閔汝任)‧지평(持平) 이척(李惕) 등은 자신들의 체직을 청하면서 사헌부의 결단을 비판하였다. 슬하에 아들로 1621년(광해군 13)에 무과에 급제한 원천군(原川君) 가선대부(嘉善大夫)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원숙(元■)을 두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원맹수(元孟穟)의 4세손으로,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전행장례원사의(前行掌隷院司議) 원순보(元純輔)이다.
1588년(선조 21) 식년시에 생원 3등 35위로 합격하였다. 관직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선조 40) 감찰로 재임하던 중, 사헌부 관료들이 혜민서(惠民署)에서 차를 마시며 업무를 의논하던 다시(茶時)에 자신의 종과 승지(承旨) 박진원(朴震元)의 종이 다툼이 있었는데, 평소 음주를 즐겼던 원사열(元士悅)은 공청(公廳)에서 만취한 상태로 자신의 종이 하소연을 듣고선 화를 내며 금부나장(禁府羅將)에게 명하여 박진원의 종을 잡아들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당상관(堂上官) 시종신(侍從臣) 박진원의 집에 금부나장을 풀어 종을 잡아들인 일은 경우에 어긋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결국 파직되었다. 이후 사헌부에서 원사열의 사건에 함께 연루된 박진원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와 관련하여, 윤허되지는 않았으나, 이 탄핵을 반대하여 정언(正言) 기협(奇協)을 비롯한 행대사간(行大司諫) 홍식(洪湜)‧정언 이호신(李好信)‧사간(司諫) 조탁(曺倬)‧헌납(獻納) 유성(柳惺)‧대사헌(大司憲) 황섬(黃暹)‧장령(掌令) 민여임(閔汝任)‧지평(持平) 이척(李惕) 등은 자신들의 체직을 청하면서 사헌부의 결단을 비판하였다. 슬하에 아들로 1621년(광해군 13)에 무과에 급제한 원천군(原川君) 가선대부(嘉善大夫)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원숙(元■)을 두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原州元氏世譜
宣祖實錄
原州元氏世譜
宣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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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