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열(李說)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74C5F4FFFFB1681X0 |
자(字) | 천뢰(天賚) |
호(號) | 애일당(愛日堂) |
생년 | 1553(명종 8) |
졸년 | 1609(광해군 1)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진성(眞城) |
활동분야 | 호국 > 의병 |


[상세내용]
이열(李說)
1553년(명종 8)∼1609년(광해군 1). 조선 중기 의병장. 자는 천뢰(天賚)이고,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이고, 본적은 경상북도 흥해(興海)이고, 출신지는 경상남도 울주군(蔚州郡)이다.
증조부는 이희손(李希孫)이고, 조부는 이언국(李彦國)이다. 부친 이덕원(李德元)과 모친 이세원(李世元)의 딸 여강이씨(驪江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손신(孫愼)의 딸 월성손씨(月城孫氏)이다.
향리의 사림들에 의해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올랐으나 부끄럽게 여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왜적의 침입을 당하여 경주에서 종숙부 호군 이봉수(李鳳壽)와 함께 적을 맞서 싸우다가 종숙부가 죽자 끝까지 추격하여 물리쳤다. 또 백운(白雲) 권응수(權應銖)‧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와 함께 영천(永川)에서 적에게 화공(火攻)을 써서 싸워 성을 되찾았다.
1594년(선조 27) 곽재우(郭再祐)가 악견산성(岳堅山城)을 지킨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거느리고 가서 적병의 길목을 막았다. 1596년(선조 29) 곽재우와 함께 팔공산에서 창녕 근처 13개 읍의 의병들을 회맹(會盟)하였다. 1597년(선조 30) 곽재우와 함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지켰는데 적의 형세가 거세어지자 화왕산성(火王山城)으로 옮겨 의병 600여 명과 나무를 쌓고 불을 놓아 끝까지 성을 지켜냈다. 이 일로 조정에서 공을 인정하여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였다. 향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이사경(李士警)‧이사건(李士謇)‧이사응(李士譍)이다.
묘는 경상남도 울주군에 있다.
저서로 『애일당(愛日堂集)』이 있다.
증조부는 이희손(李希孫)이고, 조부는 이언국(李彦國)이다. 부친 이덕원(李德元)과 모친 이세원(李世元)의 딸 여강이씨(驪江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손신(孫愼)의 딸 월성손씨(月城孫氏)이다.
향리의 사림들에 의해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올랐으나 부끄럽게 여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왜적의 침입을 당하여 경주에서 종숙부 호군 이봉수(李鳳壽)와 함께 적을 맞서 싸우다가 종숙부가 죽자 끝까지 추격하여 물리쳤다. 또 백운(白雲) 권응수(權應銖)‧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와 함께 영천(永川)에서 적에게 화공(火攻)을 써서 싸워 성을 되찾았다.
1594년(선조 27) 곽재우(郭再祐)가 악견산성(岳堅山城)을 지킨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거느리고 가서 적병의 길목을 막았다. 1596년(선조 29) 곽재우와 함께 팔공산에서 창녕 근처 13개 읍의 의병들을 회맹(會盟)하였다. 1597년(선조 30) 곽재우와 함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지켰는데 적의 형세가 거세어지자 화왕산성(火王山城)으로 옮겨 의병 600여 명과 나무를 쌓고 불을 놓아 끝까지 성을 지켜냈다. 이 일로 조정에서 공을 인정하여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였다. 향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이사경(李士警)‧이사건(李士謇)‧이사응(李士譍)이다.
묘는 경상남도 울주군에 있다.
저서로 『애일당(愛日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愛日堂集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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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