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필(崔光弼)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D5CAD11D544B1553X0 |
자(字) | 정로(廷老) |
생년 | 1553(명종 8) |
졸년 | 1608(선조 41)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강릉(江陵)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최영(崔韺) |
외조부 | 목함(睦諴) |

[관련정보]
[상세내용]
최광필(崔光弼)
1553년(명종 8)∼1608년(선조 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정로(廷老).
부친은 감찰 최영(崔韺)이며, 모친은 목함(睦諴)의 딸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이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2년 예안현감이 되었고, 1604년 봉상시주부를 거쳐, 1606년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가 되었다.
1607년 강원도도사 재직시 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즉, 강원도주민들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극도로 곤궁한데도 왕실은 궁궐축조에 필요한 동량(棟樑)을 조달하고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도민들을 가혹하게 독촉하여 이들은 농사를 전폐하다시피하고 선비나 노비까지도 역사에 동원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당시의 민폐를 올바로 지적하였다.
이어 궁궐축조의 중지를 주장하였으나 왕실에 의하여 묵살되었고, 이 상소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1623년 이이첨(李爾瞻)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정영국(鄭榮國)‧신광업(辛光業) 등과 함께 주살되었다. 사관(史官)의 인물평에 따르면 오졸(迂拙)하지만 효행이 있었다고 한다.
부친은 감찰 최영(崔韺)이며, 모친은 목함(睦諴)의 딸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이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2년 예안현감이 되었고, 1604년 봉상시주부를 거쳐, 1606년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가 되었다.
1607년 강원도도사 재직시 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즉, 강원도주민들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극도로 곤궁한데도 왕실은 궁궐축조에 필요한 동량(棟樑)을 조달하고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도민들을 가혹하게 독촉하여 이들은 농사를 전폐하다시피하고 선비나 노비까지도 역사에 동원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당시의 민폐를 올바로 지적하였다.
이어 궁궐축조의 중지를 주장하였으나 왕실에 의하여 묵살되었고, 이 상소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1623년 이이첨(李爾瞻)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정영국(鄭榮國)‧신광업(辛光業) 등과 함께 주살되었다. 사관(史官)의 인물평에 따르면 오졸(迂拙)하지만 효행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용만(金容晩)
명 : "광필(光弼)"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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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