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철(張世哲)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A5C138CCA0B1552X0 |
자(字) | 시보(時保) |
생년 | 1552(명종 7)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인동(仁同[3]) |
활동분야 | 문신 |

부 | 장경안(張景安) |

[상세내용]
장세철(張世哲)
1552년(명종 7)~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시보(時保)이다. 본관은 인동(仁同[3])이다.
부친은 창신교위(彰信校尉) 장경안(張景安)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시에서 생원 3등 46위로 합격하였다.
대북파(大北派)의 영수였던 이이첨(李爾瞻)의 문인으로 광해군 대에 활발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선조 대에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냈고, 광해군 대에는 선산부사(善山府使)‧충주목사(忠州牧使)‧전주부윤(全州府尹) 등 외직을 두루 거쳤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 충주목사로 임용되었으나 1611년(광해군 3) 사람이 까다롭고 망령되어 일처리가 전도된데다가 형벌을 남용하였다는 죄목으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610년(광해군 2) 선혜청의 법을 팔도에 두루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며, 백성의 구휼문제와 재정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1616년(광해군 8)에는 호조참의로서 백성의 부역을 균등히 하고, 국가재정을 풍족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1617년(광해군 9)에는 국가의 재정이 탕진된 것을 염려하며 선혜청(宣惠廳)의 법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성(李𢜫)‧유숙(柳潚) 등과 함께 적괴의 심복으로 몰렸으며, 폐모론을 주장하였다는 죄명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1628년(인조 6) 대북 잔당과 함께 선조의 서자인 인성군(仁城君)을 추대하려 하였다는 역모에 연루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부친은 창신교위(彰信校尉) 장경안(張景安)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시에서 생원 3등 46위로 합격하였다.
대북파(大北派)의 영수였던 이이첨(李爾瞻)의 문인으로 광해군 대에 활발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선조 대에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냈고, 광해군 대에는 선산부사(善山府使)‧충주목사(忠州牧使)‧전주부윤(全州府尹) 등 외직을 두루 거쳤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 충주목사로 임용되었으나 1611년(광해군 3) 사람이 까다롭고 망령되어 일처리가 전도된데다가 형벌을 남용하였다는 죄목으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610년(광해군 2) 선혜청의 법을 팔도에 두루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며, 백성의 구휼문제와 재정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1616년(광해군 8)에는 호조참의로서 백성의 부역을 균등히 하고, 국가재정을 풍족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1617년(광해군 9)에는 국가의 재정이 탕진된 것을 염려하며 선혜청(宣惠廳)의 법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성(李𢜫)‧유숙(柳潚) 등과 함께 적괴의 심복으로 몰렸으며, 폐모론을 주장하였다는 죄명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1628년(인조 6) 대북 잔당과 함께 선조의 서자인 인성군(仁城君)을 추대하려 하였다는 역모에 연루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仁祖實錄
[집필자]
나영훈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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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