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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복고(琴復古)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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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호여(皞如)
호(號)송음(松陰)
생년1549(명종 4)
졸년1631(인조 9)
시대조선중기
본관봉화(奉化)
활동분야호국 > 의병

[상세내용]

금복고(琴復古)
1549년(명종 4)∼1631년(인조 9). 조선 중기 의병. 자(字)는 호여(皞如)이고, 호(號)는 송음(松陰)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고,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천(榮川)이다.

부친은 금인(琴軔)이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내금위(內禁衛) 전응복(全應福)의 손녀 옥천전씨(沃川全氏)이고, 둘째 부인은 첨추(僉樞) 남계홍(南繼洪)의 딸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타고난 자실이 신중하고, 품행또한 예의바르고 엄숙하였다. 그래서 벗들과 여러 선비들이 추앙하면서도 어려워하였다.

1573년(선조 6) 식년시 생원 3등 37위로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하며 세운 공으로 원종훈호군(原從勳護軍)에 이름이 올랐으며, 유림들의 천거로 강릉참봉(江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강릉참봉 재임 시절 영천경재소(榮川京在所)를 사칭하며 영천군의 색리(色吏)들을 협박해 돈을 뜯어낸 일과 고을백성들 대신 거위를 나라에 바치고 그 거위 값을 고을백성들로부터 비싸게 거둬들인 일이 발각되어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지낸 박선장(朴善長)‧권호신(權好臣) 등과 함께 구만(龜灣)에 서당을 짓고 함께 후진 양성에 힘썼다.

슬하에 아들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註官)을 지낸 금시조(琴是調)가 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朝鮮王朝實錄
鳳城琴氏世譜
奉化郡史
水西先生文集

[집필자]

김상현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