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극가(安克家)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C548ADF9AC00B1547X0 |
| 자(字) | 의지(宜之) |
| 호(號) | 뇌곡(磊谷) |
| 생년 | 1547(명종 2) |
| 졸년 | 1614(광해군 6) |
| 시대 | 조선중기 |
| 본관 | 탐진(耽津) |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 부 | 안기(安沂) |
| 모 | 의령남씨(宜寧南氏) |
| 외조부 | 남지(南至) |
| 저서 | 『뇌곡일고』 |

[상세내용]
안극가(安克家)
1547년(명종 2)∼1614년(광해군 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의지(宜之), 호는 뇌곡(磊谷).
부친은 찰방 안기(安沂)이며, 모친은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도사 남지(南至)의 딸이다. 이정(李楨)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 45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 1601년 선교랑(宣敎郞)‧제용감(濟用監)‧사옹원(司甕院) 등의 봉사, 1605년 삼가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권문세가와 파당에 치우침이 없이 충직과 실천을 지표로 삼아서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와 호호정(浩浩亭)을 건립하여 경전을 연구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부형이 적병과 싸우다가 학살을 당함에 진중에 돌입하여 시신을 거두고 결사 대항하니 왜병이 그의 충효에 감복하여 마을 앞에 ‘충효리(忠孝里)’라는 세글자를 써놓고 물러갔다고 한다.
초계(草溪)의 송원서원(松原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인 『뇌곡일고』가 『탐진세고』에 수록되어 있다.
부친은 찰방 안기(安沂)이며, 모친은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도사 남지(南至)의 딸이다. 이정(李楨)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 45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 1601년 선교랑(宣敎郞)‧제용감(濟用監)‧사옹원(司甕院) 등의 봉사, 1605년 삼가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권문세가와 파당에 치우침이 없이 충직과 실천을 지표로 삼아서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와 호호정(浩浩亭)을 건립하여 경전을 연구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부형이 적병과 싸우다가 학살을 당함에 진중에 돌입하여 시신을 거두고 결사 대항하니 왜병이 그의 충효에 감복하여 마을 앞에 ‘충효리(忠孝里)’라는 세글자를 써놓고 물러갔다고 한다.
초계(草溪)의 송원서원(松原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인 『뇌곡일고』가 『탐진세고』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耽津世稿
三綱行錄
睡足集
三綱行錄
睡足集
[집필자]
양홍렬(梁鴻烈)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