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필동(鄭必東)
[생원] 숙종(肅宗) 1년(167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9위(39/100)
[인물요약]
[이력사항]
선발인원 |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
전력 | 유학(幼學) |
타과 | 1684년(숙종 10) 갑자(甲子) 정시(庭試) 문과(文科) 병과(丙科) 9위 |
부모구존 | 구경하(具慶下) |
[가족사항]
[부(父)]
[처부(妻父)]
[안항(鴈行)]
제(弟) :
정도동(鄭道東)
제(弟) : 정세동(鄭世東)
제(弟) : 정세동(鄭世東)
[주 1] | 호 : 『동래정씨기미세보(東萊鄭氏己未世譜)』(1919)를 참고하여 호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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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 | 졸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卷之23, 명류(名流), [정필동(鄭必東)의 비명(碑銘)](金昌翕)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무술년(戊戌年, 1718년 숙종 44년)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는데, 강릉(康陵, 명종의 능)의 석물(石物)을 수보(修補)하는 일 때문에 억지로 일어나 부름에 나아갔으나 병이 더욱 위태로웠다. 찾아와서 물어보는 자가 있으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상리(常理)이니, 부(符)가 이르면 떠나는 것일세. 어찌 슬퍼할 것이 있겠소.”라고 하였다. 병이 든 뒤에도 누누이 말하는 것이 임금을 그리워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일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끝까지 가사(家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공의 부인이 나가서 살펴보면 손을 휘저어 나가게 하면서 말하기를,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운명하지 않는 법이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해 6월 15일에 집에서 졸(卒)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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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3] | 처부 : 『동래정씨기미세보(東萊鄭氏己未世譜)』(1919)를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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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을묘식년사마방목(乙卯式年司馬榜目)』(의성김씨 사우당(四友堂[金關石]) 종택)
[소장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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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서울시스템, 1997.)을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1-12-30 | 『을묘식년사마방목(乙卯式年司馬榜目)』(『조선시대 생진시방목(朝鮮時代生進試榜目)』8책, 국학자료원, 2008.)으로 출전을 변경하였습니다. |
2015-01-30 | 『을묘식년사마방목(乙卯式年司馬榜目)』(의성김씨 사우당(四友堂[金關石]) 종택)으로 출전을 변경하였습니다. |
2018-03-12 | 『을묘식년사마방목(乙卯式年司馬榜目)』(의성김씨 사우당(四友堂[金關石]) 종택)을 [원문이미지 보기]로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