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량(張德良)
[고려문과] 공민왕(恭愍王) 18년(1369) 기유(己酉) 기유방(己酉榜) 동진사(同進士) 3위(13/33)
[인물요약]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 33명 [乙3・丙7・同進23] |
전력 | 진사(進士) |
관직 | 한성부윤(漢城府尹) |
관직 |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장○○(張○○)
[조부(祖父)]
성명 :
장○○(張○○)
[증조부(曾祖父)]
성명 :
장○○(張○○)
[주 1] | 호 : 『동문선(東文選)』 卷之79, 기(記), [임정기(林亭記)]를 참고하여 호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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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 | 본관 : 1. 『양촌집(陽村集)』 卷之一0, 詩, [임정기(林亭記)를 지어 준 데에 사례한 대사성(大司成) 장덕량(張德良)의 시에 차운하다.(次張大司成德良謝作林亭記詩韵)]와 『양촌집(陽村集)』 卷之一4, 記類, [임정기(林亭記)]에 나오는 "吾同年大司成丹陽張先生"를 참고하여 본관을 “단양(丹陽)”으로 일단 추정함. 2.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과 『등과록(登科錄)』(일본 도요분코(東洋文庫)[VII-2-35])에는 장아(張莪)가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문과 급제자 계증(季曾)의 부(父)라는 사실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은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도 마찬가지이나 다만 본(本)을 창녕(昌寧)이라 하였으며 한편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에는 단양(丹陽)이라 하였고 부(父)와 조(祖)의 이름까지도 父歡, 祖德良이라 밝히고 있다. 그런데 현존 단양장씨족보에는 장아와 그의 가계가 나오며 그 내용이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과 일치한다. 그러나 『씨족원류(氏族源流)』에는 장아를 창녕장씨(昌寧張氏)편에 수록하였고, 두 아들 계증(繼曾), 계이(繼弛)를 싣고 있다. 또, 계증(繼曾)의 사위이며 문과를 거쳐 연산조 때 영상(領相)을 지내는 문화인(文化人) 유순(柳洵)도 싣고 있는데, 『씨족원류(氏族源流)』 문화류씨편을 보면 유순(柳洵)의 처부를 창녕인(昌寧人)으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장아의 본(本)이 창녕(昌寧)이며 그의 부조(父祖)는 미상이라고 한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 기사가 신빙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되나 여기에서는 일단 위에서 말한 단양장씨족보의 기사(記事)를 이용하였다. " 라는 송준호 교수의 주장을 따라 일단 본관을 단양으로 추정함. |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소장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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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을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2-11-30 |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을 [원문이미지 보기]로 등록하였습니다. |
2013-11-22 | 『동문선(東文選)』 卷之79, 기(記), [임정기(林亭記)]를 참고. 그러나 이 것은 임정이 호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일 뿐임. |
2013-11-22 | 『양촌집(陽村集)』 卷之一0, 詩, [임정기(林亭記)를 지어 준 데에 사례한 대사성(大司成) 장덕량(張德良)의 시에 차운하다.(次張大司成德良謝作林亭記詩韵)]와 『양촌집(陽村集)』 卷之一4, 記類, [임정기(林亭記)]에 있는 "吾同年大司成丹陽張先生"이라는 문구를 참고하여 본관을 추가하였습니다. |